[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8] 충선왕은 왜 7개월 만에 폐위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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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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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7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사진 = 충선왕 즉위년 고려사]

충선왕이 첫 번째 왕위에 오른 것은 1298년이었다. 이때는 이미 쿠빌라이가 죽고 없었고 손자 테무르(成宗)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지 4년 째 되던 해였다. 2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정월에 즉위해서 7개월 만인 8월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 몽골인 왕비와의 갈등이 결정적

[사진 = 몽골 황태후]

충선왕이 왕위에서 밀려나게 되는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다. 과감한 개혁 작업 추진에 대한 반발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몽골출신 왕비와의 갈등이다. 지금까지의 평가는 충선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이유는 전자이며 후자인 왕비와의 갈등은 폐위시키기 위한 빌미로 작용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폐위되는 과정을 보면 몽골인 왕비와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즉위와 동시에 대대적 개혁 추진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대대적인 개혁을 천명했다.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서 고려가 당면하고 있던 폐단을 과감히 개혁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30여개항의 교서를 발표했다. “과인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현실의 폐단을 계속해서 덜고 없앴으나 대신들의 숫자가 옛 제도의 갑절이나 된다. 이 때문에 모든 일이 지체되니 마땅히 줄여야 한다. 이제 역대 관직을 살펴 바꿀 것은 바꾸고 긴급하지 않은 기관은 한 기관으로 합쳐 사무가 쉽게 처리되기를 바라노라” 충선왕이 내린 교서의 한 대목이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인사행정에 문란을 가져왔던 정방(政房)을 폐지했다. 이 기구는 주로 몽골에 충성하던 부원세력(附元勢力)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지방행정에도 혁신을 가해 세도가들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여러 가지 민폐를 없애는 조치를 취했다. 관제개혁도 단행했다. 사림원(詞林院)과 광정원(光政院) 등 새로운 기구를 설치해 왕권을 강화했다. 말하자면 몽골의 간섭으로 비틀어진 제도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많은 신진 관료들을 등용시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 反元 성격 개혁이 반발 불러와

[사진 = 제왕운기(이승휴)]

이러한 개혁 작업에는 몽골지배의 폐해를 걷어 내려는 많은 것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충선왕은 이러한 개혁을 위해 이승휴(李承休)를 비롯한 친위세력을 등장시켰다.
 

[사진 = 정가신 사당]

[사진 = 안향]

 
장인 조인규(趙仁規)를 비롯해 문장가인 정가신(鄭可臣) 학자 안향(安珦)등도 여기에 포함된 인물이다. 충선왕은 사림원에 가서 학자들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고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그리고 촛불을 들려 학자들을 집까지 바래다주게까지 했다. 이는 다분히 반원적(反元的)인 개혁이었다. 개혁은 항상 수구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몽골과 끈을 맺으면서 새로 부상했던 신진 세력들이었다. 부원세력으로 불리던 이들은 충선왕의 개혁 작업을 공격하면서 몽골 조정에 그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맞섰다. 그들 가운데는 아예 고려에 행성(行省: 行中書省)을 세워 아예 고려를 몽골의 영토로 편입시키자는 이른바 입성론(入省論)을 들고 나오는 사람까지 있었다.

▶ 몽골인 왕비가 만든 무고 사건

[사진 = 고려후기 왕비복식]

이런 상황에서 충선왕의 개혁정책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것이 이른바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이다. 이 사건은 충선왕과 금실이 좋은 조인규의 딸 조비를 시기한 몽골출신 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발생시켰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개혁 반대세력이 공주와 손을 잡고 원나라에 고자질해서 만들어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충선왕이 즉위를 위해 귀국하면서 함께 고려로 온 계국대장공주, 보다시리는 먼저 세자빈으로 있었던 조비를 밀어내고 제 1왕비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과 몽골인 출신 왕비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반면 충선왕은 조비를 끔찍이 아껴 계국대장공주의 질투심에 불을 질렀다. 조비는 당시 세력가인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의 딸이었다.

▶ 무고사건으로 조비와 장인 압송

[사진 = 조인규관련 고려사]

충선왕 즉위년인 1298년 4월, 조비를 질투한 계국대장공주는 조비를 무고하는 위그루문 편지를 원나라 황태후에게 보내게 된다.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고자질이었다. 여기에 충선왕이 관직을 변경해 정사를 반원적인 차원에서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공주가 수하인 쿠쿠부카(闊闊不花)를 통해 투서가 황태후에게 전달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며칠 후 다시 조비를 무고하는 익명서가 궁문에 나붙었다. 여기에는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서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게 저주하고 자기 딸에게 사랑을 집중하도록 축원하게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작이 분명해 보이는 이 익명서를 구실로 공주는 조인규와 그의 처 그리고 친족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동시에 원나라에 투서사건을 알렸다. 이에 황태후는 100명의 사절단을 보내 사건을 추궁하도록 했다.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조인규의 처가 거짓 자복을 했다. 이에 따라 조인규와 그의 처 그리고 사위인 최충소 등이 대도로 압송됐다.
 

[안서(安西)지역 공동묘지]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사신의 숙소로 운반해 갔다. 대도로 압송된 조인규는 안서(安西)에, 최충소는 공창(鞏昌)으로 유배됐다.

▶ 충선왕 7개월 만에 폐위
황태후는 승려 5명과 도사 2명을 보내 공주에 대한 저주를 풀어주도록 하고 충선왕과 공주가 합방을 통해 관계가 좋아지도록 하는 등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일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충선왕이 궁지에 몰린 상황을 이용해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충렬왕의 지지 세력들이 충렬왕의 복위를 도모했다. 결국 1298년 8월,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대도로 호송된다. 그리고 아버지 충렬왕이 복위됐다.

▶ 충선왕의 통혼에 대한 이해부족

[사진 = 몽골 궁중 연회, 술 받치는 의식]

충선왕의 폐위는 반 개혁 부원세력들의 부추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공주가 황태후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서 그 일단을 읽을 수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충선왕이 몽골과 고려 간에 통혼을 통해 형성된 두 정치집단 간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공주와의 통혼을 통해 이루어진 부마국으로서의 고려왕의 위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 결국 폐위로 이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고려왕과 몽골 공주의 통혼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몽골과 고려를 인적 차원에서 결합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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