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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41] 세도가가 된 奇氏가문의 끝은?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8-01-12 13:34수정 : 2018-01-12 13:34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살 판 난 기씨 집안
기씨가 대원제국의 황후 자리에 오르면서 살판이 난 것은 고려에 남아 있던 그녀의 집안이었다. 딸을 공녀로 보낼 정도로 내세울 것이 없었던 기씨 집안은 졸지에 고려의 명문 가문으로 발돋움 하게 된다. 우선 기황후의 아버지 자오(子敖)는 처음에는 영안왕(榮安王), 나중에는 경왕(敬王)으로 봉해졌다. 기씨의 조부와 증조부까지 왕으로 추증될 정도로 왕실가문이 됐다.
 

[사진 = 기철관련 고려사]

오빠인 기철(奇轍)은 원나라와 고려에서 벼슬을 받은 유명인사가 됐다. 정동성참지정사(征東城參知政事)와 요양성평장사(遼陽省平章事)는 몽골 조정에서 기철에게 내려준 벼슬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고려에서는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주도첨의사사(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徒都僉議使司)라는 긴 이름의 벼슬과 함께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 고려 조정 좌지우지하던 세도가

[사진 = 익주(익산) 위치]

기(奇)씨 일문은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세도가가 됐고 고려는 가히 기(奇)씨 천하라고 할 수 있었다.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때 금마군(金馬郡)이 익주(益州)로 승격한다. 지금의 전북 익산은 여기에서 연유한 지명이다. 이 지역이 승격한 것은 금마군이 기황후 어머니의 고향, 즉 외향(外鄕)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기황후의 위세가 고려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진 = 충혜왕 추정도]

딸과 동생을 잘 둔 덕분에 권력을 잡게 된 기씨 일문이 고려에서 부린 횡포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은 몽골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왕까지 바꿔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비록 실정으로 지탄을 받기는 했지만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은 기철의 고변으로 왕의 자리에서 밀려나 원나라로 끌려간 뒤 귀양지로 가던 도중 숨지기도 했다. 기씨 일문의 권세는 기황후의 몽골 황실 내에서의 위치나 몽골제국의 부침과 궤를 같이 했다.

▶ 대칸에게 양위 강요
1353년, 14살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황후는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했다. 특히 박불화를 군사 통솔 최고 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1358년, 오래 동안 이어진 천재지변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화되자 그녀는 자정원의 자금을 풀어 기아자들을 구호하고 십여 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등 실제로 통치자의 역할을 맡아하기도 했다.

그만큼 황실 안에서 지위가 굳어지고 지지 세력의 기반이 단단해졌다는 얘기다. 이즈음에 남편인 토곤 테무르는 정치에 권태를 느끼고 하마(哈麻)라는 간신의 농간으로 방중술(房中術)에 빠져있었다. 대칸이 사실상 국정에 손을 떼면서 조정은 어지러워졌고 모든 주요 정무를 황태자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사진 = 티베트 밀교 불상]

더욱이 황하의 범람을 비롯한 천재지변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가적 위기상황이 찾아와 있었다. 기왕후는 긴급하게 대칸의 선위(禪位)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남편인 토곤 테무르에게 대칸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원사(元史)의 기록이다.

"기왕후는 황태자의 선위를 도모해 박불화로 하여금 그 뜻을 승상 태평(太平)에게 전달했지만 태평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360년 태평이 파직되고 초스칸(搠思監)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 기씨, 제1 황후 자리에 올라

[사진 = 대도 성터]

토곤 테무르는 기왕후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황태자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1364년 7월 황태자의 반대파인 볼로 테무르(孛羅帖木兒)는 군대를 이끌고 대도를 공격해 황태자의 군을 패배시키고 기황후를 유폐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불화 등 고려 환관들도 상당수 처형 됐다. 그 것도 잠시, 1365년 황태자의 지지파인 쿠쿠 테무르(廓擴帖木兒)가 대도를 회복하고 볼로 테무르를 비롯한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면서 내전은 수습됐다.

[사진 = 대도복원(그래픽)]

기황후는 토곤 테무르에게 다시 한 번 양위를 종용했지만 쿠쿠 테무르가 협조하지 않고 군사들과 함께 대도를 떠나면서 선위는 무산이 됐다. 이때를 즈음해 제 1황후가 사망하면서 기씨는 정후(正后)의 자리에 올랐다. 명실공이 기황후의 천하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나라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데 그녀의 세상이 찾아온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너져가는 몽골제국을 살려내기 위해 기왕후가 노력한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녀의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씨 가문의 몰락
몽골 제국의 몰락은 곧바로 고려에 있는 기씨 가문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전횡을 부리던 기씨 일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한 때 기황후의 동생 기주와 그 일족인 기삼만을 양민의 토지를 빼앗은 죄 등으로 옥에 가두는 등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개혁을 반대하는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쳐 오히려 개혁 주도 세력이 역풍을 맞는 사례까지 있었다.
 

[사진 = 공민왕 초상화]

그러나 몽골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기황후의 영향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맞춰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몽고의 잔재를 걷어내는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공민왕이 가장 우선적으로 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백성의 지탄을 받아온 기씨 가문을 숙청하는 작업이었다. 친원외척(親元外戚)으로 지목된 기씨 일가가 제거 대상이 됐다. 가장 먼저 기황후의 오빠로 권력의 정상에 있던 기철(奇轍)이 1,356년 공민왕 5년에 숙청됐다. 이어 황후의 형제와 조카들이 줄줄이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숙청의 피 바람 속에 기씨 일족의 일부는 아예 원나라로 망명하기도 했다.

▶ 전남 광산군에 터전 잡은 행주 기씨

[사진 = 행주산성 기씨 가문비석]

지금 경기도 고양인 행주에 살던 행주 기씨들은 조선시대 들어 1,519년 기준(寄遵)이라는 인물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면서 다시 한 번 된서리를 맞는다. 그래서 이후 전남 장성군과 광산군으로 내려가 새 터전을 잡았다. 전남 광산군 양곡면 신용리 새말 50여 가구 가운데 두 세 가구만 빼고 모두 행주 기씨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현재 2만 3천여 명에 이르는 기씨들은 과거 조상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 역사가 일러주는 교훈
기왕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고려에 있는 가족들이 전횡을 부리도록 묵인하거나 배경이 된 것은 전적으로 기황후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좀 더 냉정히 얘기하면 고려에 있던 기씨 가문들의 잘못이 컸다.

가족의 누군가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분수를 넘어 권력을 휘두르고 부정부패에 젖어 들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숱한 역사가 그 것을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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