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37] 대원제국 어떻게 무너져 내리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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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0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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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낯설지 않은 형제 대결
형제인 두 명의 대칸이 남북에서 나란히 대치하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낯설지 않다.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형제가 서로 대칸을 자처하며 남북으로 대치하던 상황이 69년 전에 있었다. 가까이는 불과 21년 전에 카이샨과 아유르바르와다 형제, 즉 두 대칸 주장자 간의 힘겨루기도 있었다. 또 한 차례 형제간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 싱겁게 끝난 전반전

[사진 = 코실라(明宗)]

형제간의 남북대치는 싱겁게 끝났다. 적어도 전반전은 그랬다. 대도에 있던 동생 톡 테무르가 카라코룸에 있던 형 코실라에게 대칸의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뜻을 보였기 때문이다. 톡 테무르를 앞세운 실력자 엘 테무르는 명분에 밀린다고 생각해 양위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상도에서 통일 쿠릴타이를 열어 코실라를 대칸으로 옹립하겠다는 대도측의 뜻이 카라코룸으로 전달됐다. 코실라는 "그러면 그렇지"하는 마음으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미리 점검해보는 신중함을 잃었다.

▶ 미리 정해놓은 코실라 제거 계획
엘 테무르 등 친위부대들은 원래 카이샨의 추종자였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대칸이 되건 별 상관이 없어 보였지만 이들은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선 동생 톡 테무르를 옹립한데 대한 코실라의 문책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코실라가 배후세력인 차가타이군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 것을 보면 이들 세력이 대도에 들어와 실권을 장악할 지도 모른다는 것도 걱정거리였다.

이 우려를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코실라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칸의 자리를 넘겨준 뒤 기회를 봐서 코실라를 처치하는 수순을 미리 정해 두었다고 보면 된다. 봄이 되자 코실라는 남하 길에 올랐다. 자신감에 넘쳤던 코실라는 주력부대인 차가타이 군을 고비사막 북쪽에 머물게 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엘 테무르로서는 더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 옥쇄 바친 뒤 곧바로 제거
엘 테무르는 백관을 거느리고 코실라를 마중 나가 대칸의 옥새를 받쳤다. 코실라는 여름에 상도 근처에 있는 옹구차투(王忽察都)라는 곳에 도착해 이제는 황태자가 된 동생과 만났다. 그리고 오르도 안에서는 축하잔치가 베풀어졌다. 나흘 뒤 8월 6일 코실라는 갑자기 사망한다. 엘 테무르가 쳐 놓은 덫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3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진 = 상도성 유적지]

사서는 이를 폭붕(暴崩)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주로 시역(弑逆)을 당했을 때 사용하는 용어로 톡 테무르와 엘테무르에게 독살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 코실라부인 바부사카툰]

대칸의 옥새는 죽은 코실라의 아내인 황후의 이름으로 톡 테무르에게 건네졌다. 쿠데타 주도 세력은 황급히 그 곳을 떠나 상도로 돌아갔다. 9일 뒤 톡 테무르(文宗)는 상도에서 다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엘 테무르를 비롯한 친위군단은 실권을 장악했다. 결국 후반전의 승리자는 이들이 된 것이다.

▶ ‘당근’ 받고 물러난 차가타이군

[사진 = 고비사막]

대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황당해진 것은 고비사막 북쪽에 머물고 있던 차가타이군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내세울 사람까지 사라진 마당에 대세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저항하지 않는 대가가 돌아왔다. 엘 테무르가 안겨준 ‘당근’을 받고 이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중앙아시아로 돌아간 것이다.
 

[사진 = 트루판 분지]

그 당근은 투르판 분지를 포함한 천산 일대의 넓은 평원으로 이 지역은 이 때 확실하게 차가타이한국의 영토로 넘어갔다.

▶ 대칸, 친위부대 꼭두각시로 전락
한동안 여인의 손에 놀아나던 제국은 이제 친위군단의 손에 놀아날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여전히 대칸이 꼭두각시로 전락하면서 최고 권력자의 권위는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신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엘 테무르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상층부의 여러 직함을 혼자서 겸직했다. 친위부대의 세력도 막강해지면서 군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몽골족의 주류가 아니라 대부분 투르크 출신의 이방인들이었다. 말하자면 ‘노예군단’이 최고의 권부를 장악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몽골족의 화합과 통합이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대칸을 중심으로 지탱해왔던 몽골의 공동체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천재지변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다.

홍수와 지진 등이 이어지면서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있었다. 1310년대부터 시작한 천재지변이 극심해지면서 흉년과 기근이 만연한 것은 물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14세기의 재앙은 비록 유라시아 대륙 뿐 만이 아니었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유럽의 인구를 거의 절반으로 줄여 놓을 정도로 전 세계에 재앙이 덮치고 있었다.

▶ 43일 만에 죽은 7살 대칸
그 와중에 권위가 땅에 떨어진 대칸 톡 테무르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 채 친형을 암살한 괴로움에 시달리다 죽었다. 3년 간 대칸의 자리에 있었던 그가 죽었을 때 나이는 불과 29살이었다. 톡 테무르가 후계자를 형의 아들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 = 이린지발(寧宗)]

그래서 대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7살에 불과한 코실라의 둘째 아들 이린지발(亦憐眞班: 寧宗)이었다. 하지만 이 어린아이는 즉위한 지 43일 만에 죽어 버렸다. 당시 코실라의 첫째 아들은 광서(廣西)지방의 계림(桂林)에 머물고 있었다. 고려의 서해 대청도로 보내져 유배생활을 했던 코실라의 첫째 아들 토곤 테무르는 이때 계림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가 바로 대원제국의 마지막 대칸이 되는 인물이다.

▶ 중국 땅 마지막 대칸 토곤 테무르

[사진 = 계림이강]

계림은 중국 여행의 절정이 계림이고 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라고 할 정도로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계림의 이강(離江)은 현세 속의 선경(仙境)이라 불리면서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관광 코스다.
 

[사진 = 계림 상비산]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보내던 13살의 토곤 테무르는 온갖 권력다툼과 음모로 얼룩진 대도로 옮겨와 대원제국의 사실상 마지막 대칸으로서 굴곡 많은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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