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36] 대원제국 어떻게 무너져 내리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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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1-0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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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역사의 피고-다기 母子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수월한 작은 아들을 대칸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관료들과 짜고 큰아들을 죽인 다기는 몽골 역사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여인이다. 불평불만을 가진 관료들의 부추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친아들을 죽이는 쿠데타를 주도한 것이다. 다기의 속셈은 제국을 자기 손안에서 주무르는 여인천하를 만들겠다는 야망이 있었다고 봐야한다.

또 다기를 부추긴 관료들은 몽골식의 불편한 삶이 아니라 중국식의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모든 몽골인들의 지지 속에 강력한 대원제국을 만들어 가려던 카이샨의 구상을 좌절시켜 버렸다. 몽골인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 발전의 희망을 꺾어 버린 이들을 어찌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포용정책이 불러온 화근(禍根)

[사진 = 흥성궁이 있던 북해 일대]

카이샨은 과거 동생을 옹립하려던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고 포용한 것이 결국 스스로의 목을 죄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칸 카이샨은 어머니 다기가 음양가의 말을 전한 것은 카이샨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변명하자 이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다기카툰을 황태후로 승격시키고 그녀를 위해 흥성궁(興聖宮)이란 궁궐까지 세워줬다.
 

[사진 = 아유르바르와다(仁宗)]

그녀를 흥성태후(興聖太后)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다기의 간청에 따라 동생 아유르바르와다를 황태자로 삼았다. 다만 그 후에는 자신의 아들 코실라를 칸 위에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황태후, 동생을 황태자로 삼았던 것도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카이샨은 일부 측근이 황태자 교체를 건의했으나 그 것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투르크계 친위부대의 신분상승을 보장해 주면서 이들을 열렬한 지지 세력으로 확보해 두어 후일 아들의 복위를 위한 기반은 남겨 놓았다.

▶ 몽골식 여인천하
새로 들어선 아유르바르와다 정권은 인적 물적 청산을 통해 카이샨의 색채를 철저히 제거해나갔다.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에 취임하기도 전에 카이샨의 주요 신하들이 구금되고 며칠 뒤 대신들 대부분이 처형됐다. 카이샨 개혁의 핵심기관이었던 상서성도 폐지됐다. 대칸에 오른 인종(仁宗) 아유르바르와다는 궁궐 안에 칩거한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진 = 시데발라(英宗)]

거의 모든 것은 다기에 의해 처리됐다. 그의 치세 10년 동안 어머니 다기는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안락한 삶을 즐겼다. 다기는 아유르바르와다가 먼저 죽자 이번에는 손자인 시데발라(碩德八剌)를 꼭두각시 대칸으로 만들었다. 그가 바로 영종(英宗)이다. 그리고 다기는 자신의 뜻대로 나라를 주물렀다.

심지어 자신의 친손자인 카이샨의 아들들까지 모두 외지로 추방했다. 특히 카이샨의 아들 코실라를 죽이려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도망친 코실라는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던 차가타이한국으로 몸을 피했다.

▶ 해체의 길로 들어선 몽골제국
그런 가운데 몽골의 것들이 배척되고 한문화가 우대되는 상황이 도래했다. 일한국과 킵차크한국 차가타이한국 등 대몽골제국의 3대 울루스는 탈(脫)몽골 노선을 걷는 대도에 더 이상 사절단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몽골제국이 해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나라를 주무르던 다기가 죽었다. 대칸 시데발라는 할머니 다기가 죽자 실권회복을 서둘렀다. 하지만 젊은 시데발라는 너무 과격하게 탄압과 숙청을 단행했다. 공포감을 느낀 옛 다기 인맥을 중심으로 반발 세력이 형성됐다.
 

[사진 = 상도복원(그래픽)]

1,323년 상도에서 대도로 남천 하던 도중 시데발라는 남파점(南坡店)이라는 곳에서 야영했다. 이 때 반발세력들이 게르로 침입해 시데발라를 암살했다. 이른바 남파의 변이었다. 실권을 장악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21살의 젊은 대칸이 또 살해된 것이다.

▶ 카이샨 추종자, 쿠데타세력 대적

[사진 = 이순 테무르(泰定帝)]

이번에 모반자들이 내세운 인물은 이순 테무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쿠빌라이에 이어 대칸에 오른 테무르의 형인 카말라(甘麻剌)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고려 충선왕의 처남이었다. 카말라가 사실상 쿠빌라이의 장손격인 인물이니 이순 테무르는 대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카말라는 할아버지 쿠빌라이가 죽은 뒤 동생 테무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자 몽골 초원으로 들어가 고비사막 이북 주로 케룰렌강 지역을 지켰다.
 

[사진 = 케룰렌강]

이순 테무르는 아버지가 자리 잡았던 케룰렌 강변에서 대칸에 취임했다. 모반자들은 태정제(泰定帝) 이순 테무르를 꼭두각시로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순 테무르는 오히려 이전 칸과 같은 꼴이 되지 않으려고 강공을 취했다. 더욱이 대도의 저항세력들이 새 정권을 권력을 찬탈한 불법정권이라고 공격하고 나서자 이순 테무르는 자신을 옹립한 모반자들을 과감하게 처형해 버렸다. 이후 5년 간 대칸의 자리에 있었던 이순 테무르 역시 쿠데타로 숨진다.
 

[사진 = 아리기바(天順帝)]

1,328년 상도에서 일어난 쿠데타의 주축 세력은 태정제 이순 테무르의 왕태자 아리기바(阿速吉八)를 대칸으로 내세웠다. 그가 바로 천순제(天順帝)다. 하지만 대도에 있던 대도의 수비 대장이자 투르크계의 친위부대 지도자 엘 테무르(燕鐵木兒)가 쿠데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엘 테무르는 두 달간의 전투 끝에 상도측 군사를 제압하고 천순제 아리기바를 살해했다. 내전은 엘 테무르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엘 테무르는 문무백관을 소집해 카이샨의 아들들에게 제위의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 친위부대들은 앞서 언급한대로 어머니 다기와 동생의 쿠데타로 살해된 대칸 카이샨의 추종자들이었다.

▶ 군벌이 옹립한 대칸

[사진 = 해남도]

카이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당초 삼촌인 아유르바르와다에 이어 대칸에 오를 황태자로 지목됐던 코실라이고 둘째 아들은 톡 테무르였다. 카이샨이 살해된 뒤 황태자는커녕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코실라는 중앙에서 쫓겨나 차가타이한국에 몸을 의탁했다. 둘째 톡 테무르는 해남도에 유배돼 있었다.
 

[사진 = 톡 테무르(文宗)]

친위부대의 지도자 엘 테무르는 두 아들 가운데 해남도에 유배돼 있던 동생 톡 테무르를 대칸으로 옹립하려 했다. 두 달에 걸친 상도와 대도의 대칸 다툼이 대도 측의 전면적인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톡 테무르는 대칸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천력(天曆)이라 정했다. 그가 바로 문종(文宗)이다. 지금까지 대칸을 떠받들며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파가 세력을 잃은 대신 엘 테무르를 중심으로 한 무장들이 궁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다.

대칸이 이제는 군벌의 꼭두각시가 되는 상황이 찾아왔다. 엘 테무르는 중서성과 추밀원 그리고 어시대의 장관을 겸임하면서 사실상 대칸을 능가하는 실권자가 됐다.

▶ 두 명의 형제 대칸의 싸움
하지만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 코실라가 차가타이한국의 지원을 받아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코실라의 군대가 알타이 지역에 이르자 지역의 유력자들이 모두 나와서 코실라를 맞이했다. 아버지 카이샨이 환영을 받았던 것처럼 코실라도 몽골 유목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몽골고원에 들어선 것이다.

1329년 1월, 코실라(明宗)는 카라코룸 북쪽 초원에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명종(明宗)이다. 그렇게 해서 한해 전에 대칸에 오른 동생 톡 테무르와 맞서는 형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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