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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배철현의 아침묵상] 이주移住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입력 : 2017-12-18 06:00수정 : 2017-12-18 08:00

[사진=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나는 오늘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오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내딛는 발길이 내 인생의 목적지와 곧게 연결돼 있는가? 나는 6년 전부터 하루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 날 해야 할 일에 몰입해 완수하려고 노력하는 삶이 가치가 있다. 2011년은 내 삶의 원년이다. 그 당시 나는 이전의 삶을 아낌없이 버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새로운 나의 존재를 찾기 위해 불안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 여정은 나에게 만족스러운 그 무엇인가를 줄 것만 같았다. 인간의 수명이 백세라면, 2011년은 내가 50세 된 해이기 때문에 인생의 한가운데다. 그것은 시작과 마지막의 수학적인 평균이 아니다. 이 한가운데는 처음과 마지막이 소멸되는,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는 신비한 순간이다.
 
단테의 이주
이탈리아의 대문호이자 르네상스의 불씨를 댕긴 알리기에리 단테(1265~1321)는 자신의 인생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그 안에 몰입해 '신곡'을 남겼다. 그는 '시편' 90편에 등장하는 “인간의 수명은 칠십이고 건강하면 팔십이다”는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35세가 되던 해인 1300년 자신도 아직 경험한 적이 없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이곳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저지른 죄악이 적나라하게 쌓여있는 ‘지옥’이다. 단테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무절제, 폭력, 사기라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는 천국으로 가는 정거장인 연옥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단테의 ‘지옥’ 여행은 자신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승화를 통해 인류에게 자기 자신을 깊이 관찰해 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신곡'의 지옥 편의 첫 절은 이렇다. “우리 삶의 여정의 한 가운데서”. 단테가 이 문장에서 표현하고 싶은 심정은 이렇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여정은 기분 나는 대로 떠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행과는 달리 자신이 정말 가고 싶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그런 장소를 향해 가는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방향이며 동시에 목적지가 되기 때문에 감동스럽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목적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 여정을 떠날 장소와 시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이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과 결별하는 일이다. 이 결별을 통해 자신이 열망하는 꿈을 실천할 수 있다. 단테는 자신을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죄가 겹겹이 쌓인 ‘자기마음’이라 불리는 지옥으로 과감히 여행했다. 그런 솔직한 여행 이야기는 인류의 고전이 됐다.
 
무함마드의 이주
단테보다 앞서 이주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한 인물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상인 무함마드(570~632)다. 그는 물질의 풍요만이 인생의 목표이며 그런 풍요를 보장하는 신들과 사제들이 판을 치는 메카에서 살았다. 그는 메카에서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가는 낙타를 모는, 가난한 청년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가 어릴 때 죽은 고아였다. 신망이 높아 아랍어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의미인 ‘엘 아민’으로 불렸다.

그를 유심히 보던 당시 메카 최고 부자여인이 있었다. 미망인 카디자다. 40세인 카디자는 25세 청년 무함마드에게 청혼해 결혼했다. 무함마드는 이제 가난뱅이가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를 만끽하는 운 좋은 사람이 됐다. 그가 그저 운 좋은 사람으로만 남았다면, 오늘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엄연히 아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이름을 기억할 만하게 만들까?
 
무함마드는 종종 메카 외곽에 있는 산에 올라가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지 묵상했다. 그가 마흔살이 된 610년 어느 날, ‘히라’라는 동굴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섬세한 마음의 소리를 처음으로 듣는다. 무함마드가 감지한 이 거룩한 소리는 '꾸란'(96장1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우주를) 창조한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 낭송하라.”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다. “당신은 우주를 창조하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산과 바다, 인간과 동물, 나무와 돌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네가 보는 모든 것들을 만든 존재가 있다. 그 분이 바로 ‘너의 주인’이다. 그분이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너하고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 네 마음속 깊이 존재하는 ‘너의 주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너의 마음속에 새겨진 거룩한 경전을 네 입으로 낭송하여라.” 인간의 삶은 자신이 존재론적으로 만난 자신만의 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며, 그 깨달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한편의 시(詩)다.
 
무함마드는 62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주’를 결정했다. 자신의 모든 생존 기반을 과감히 버리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도반(道伴)들과 함께 새로운 장소로 이주한다. 그곳은 메카에서 북쪽으로 340km 떨어진 대추야자나무 숲이 우거진 야쓰리브(Yathrib)다. 야쓰리브는 후대에 ‘메디나’로 개명됐다. 무함마드는 이 이주를 ‘헤지라’(hijrah)라고 불렀다. 유목사회에서 공동체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 사람에게 내리는 가혹한 형벌은 바로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쫓겨나는 추방이다. 그는 자신의 친족을 떠나 이주해 낯선 곳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무함마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스스로 이 길을 택했다. ‘헤지라’라는 아랍어 단어의 어근인 h-j-r의 원래 의미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강제적으로 분리하다’이다. 무함마드의 과감한 선택인 ‘이주’를 통해 탄생한 신앙공동체가 ‘이슬람’이다.
 

'늑대(무절제), 사자(폭력), 표범(사기)으로부터 도망치는 단테'(1824). 윌리엄 블레이크의 단테 '신곡'중 지옥편 삽화.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예수의 이주
30세가 된 팔레스타인 청년 예수도 이 영적인 이주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동네에서 ‘요셉의 아들, 목수’로 알려졌다. 예수는 로마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보통 인간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주’ 의례를 통해 자연적인 인간에서 신적인 인간으로 변모한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금식이다.
 
예수는 요단강가에서 이상한 의례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사막의 예언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는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례’라는 상징적인 행위로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을 물 안에 잠기게 한 후 다시 건져내는 의식을 베풀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특별한 의식을 거행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씻는 상징적인 의례로 몸 전체를 물에 담구는 ‘테빌라’(tevilah)와 대야나 컵에 물을 가져와 손을 씻는 ‘네틸라트 야다임’(netilat yadayim)이다. 요한은 유대의식 ‘테빌라’를 요단강에서 행했다.

우리는 이 의식을 ‘세례’라고 부른다. 세례는 혼돈을 상징하는 물속으로 완전히 입수하였다가, 그 혼돈에서 빠져나와 빛과 질서의 세계로 탈출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의례다. 혼돈이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환경을 상징한다. 나의 경우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으로, 남자로, 한국인으로, 20세기에 일정한 세계관과 종교관을 지닌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 환경이 유일하며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식이다. 우리는 이 무식을 걷어내는 행위를 교육이라고 부른다. 질서는 그렇게 태어난 자신의 환경을 곰곰이 살펴 재정비하는 행위다. 예수는 세례를 통해 혼돈에서 나와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
 
예수의 운명을 바꿔 놓은 두 번째 이주는 ‘사십일 금식’이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1장12절)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가 사막으로 간 행위를 ‘성령’이 주도했다고 기록한다. 성령이란 예수 자신 안에서 존재하는 거룩한 소리다. 그는 그 소리를 감지하고 자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간다. 광야란 자신을 자신에게 익숙한 공동체로부터 이탈시키는 강제적인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의도적인 행위다. 예수는 이곳에서 40일간 자신이 해야 할 한 가지를 깨닫는다.
 
예수는 자신의 깨달음을 '마태복음'(1장15절)에 기록했다. “회개하라.”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사제에게 말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시선을 바꾸는 행위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단호한 결심이자 고백이며, 그 결심을 매일매일 행동으로 옮기는 수련이자 용기다. 이 구절은 ‘메타노이에테’(metanoiete)라는 그리스어로 번역됐다. ‘메타노이에테’의 의미는 ‘마음을 바꿔라’다. 이 구절을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당신은 버려야 한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복기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대치할 자신에게 감동적인 삶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까?”

예수가 아람어로 말했다.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로 ‘회개하라’를 상상하자면, ‘타브’다. ‘타브’란 ‘돌아오다; 회복하다’라는 의미다. 당신은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신의 모습을 감지한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회복하실 생각은 있습니까? 당신은 오늘 그런 여정을 떠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