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수칼럼] ‘안돼 공화국’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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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수 언론인
입력 2017-12-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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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수칼럼]

 

        [사진=손병수 언론인]



‘안돼 공화국’의 운명


“안 돼 공화국”이라는 말을 다시 들었을 때 눈과 귀를 의심했다. 지난달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대한민국 혁신성장 전략회의에서 김동연 부총리겸 기획재정부장관이 사용한 표현이다. 그는 이날 청와대 핵심 참모와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국무위원 등 80여명 앞에서 ‘혁신성장의 방향과 주요 과제’라는 주제발표를 하면서 “지금 한국의 GDP 규모는 세계 11위, 무역순위는 7~8위지만 규제 순위는 95위로 ‘안 돼 공화국’이라고 한다”고 강조했다. 20년 전 IMF 외환위기로 떠밀려가던 무렵에 자주 듣던 표현 아닌가. 당시 외신들은 노동개혁이니 금융개혁이니 말만 무성할 뿐 정치권과 정부, 강성노조가 뒤엉켜 하나도 실행하지 못하는 한국 상황을 가리켜 ‘NATO(No Action Talk Only)’ 같은 표현을 써가며 비꼬았었다.
사실 일국의 경제 사령탑이 ‘안 돼 공화국’ 같은 표현을 공개 석상에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한국경제가 처한 상황이 심각하며, 혁신성장을 통해 시급히 타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 회의 다음날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도발을 감행하고, 곧 이어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발표와 올해 3분기 1.5% 깜짝 성장 같은 큰 뉴스들이 쏟아지면서 ‘안 돼 공화국’에 담긴 김 부총리의 메시지는 이내 묻혀 버렸다. 이날 회의의 연장선에서 지난달 3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21개 부처가 ‘혁신성장을 위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대응 계획’을 발표했지만, 지난 정부에서 이른바 ‘창조 경제’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중장기 정책과제들을 종합하고 재정리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회의를 주재하면서 “혁신 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은 서로 친화적이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성장전략”이라면서 “혁신성장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은 이날 ‘속도’와 ‘성과’를 유난히 강조했다.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을 상징하는 ‘사람 중심 경제’의 양대 축인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 성장 가운데 ‘혁신’ 쪽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표현이었다. 지금까지의 구도로는 장하성 정책실장을 정점으로 하는 청와대 참모들이 소득주도 성장을, 김 부총리가 혁신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정부의 무게중심이 소득주도 성장에 치우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 주말 청와대와 여당은 예산안 법정 처리 시한을 넘겨가며 야당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는데, 소득주도 성장을 상징하는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분 보전 예산과 공무원 증원 예산, 법인세 인상안 관철이 ‘원안 사수’ 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이런 흐름은 현재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바탕에 깔고 있다. 지난주 한국은행은 6년5개월 만에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적어도 내년까지는 3%대 성장률이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 돌발변수만 없으면 이런 전망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지난 주말의 예산안 공방에서 모처럼 수출 잘되고 세금 잘 걷힐 때 분배 강화에 초점을 맞춘 소득주도 성장을 밀어붙여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 보자는 정부의 판단이 드러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금 성장률 회복이 반도체로 대표되는 일부 산업의 수출호조 덕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반도체 다음은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혁신 성장의 고민과 시급성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반도체를 대체할 먹거리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 경제의 경쟁력은 갈수록 뒷걸음질 치고 있다. 노동, 자본, 기술 등 경제에 투입되는 모든 요소들의 생산성을 종합 평가하는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외환위기 직전까지(1991~97년) 연평균 2.7%였지만 금융 위기 이후(2009~15년)에는 1.4%로 반토막 난 상태다. 이 기간 동안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2%대로 내려섰다. 이런 흐름을 되돌릴 열쇠가 창의와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혁신 성장 역량의 복원에 있다는 것 역시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김 부총리는 “혁신 성장을 위해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두 가지가 있다”면서 “바로 규제와 일자리”라고 강조했다. 그는 규제개혁은 속도가 관건이며, 규제 샌드박스 도입 등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규제개혁은 20년 전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범정부 차원의 과제로 추진해왔지만 ‘세계 95위’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관료와 업자의 결탁으로 꼭 지켜야 할 안전 규제는 뚫려 세월호 참사를 낳은 반면, 첨단 업종에서 신사업을 해보려면 온갖 규제에 묶여 창업을 포기하고 마는 구조에서 역동성과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김 부총리가 ‘일자리’로 표현한 노동개혁이다. 그는 일자리 문제의 추진 과제로 사회적 대타협, 고용안정성 확보, 노사협력 모델 구축을 제시했다. 이런 과제들은 모두 새 정부 들어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강성노조와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노동개혁과 직결된다. 다시 말해 노동개혁이 없으면 규제개혁에 아무리 속도를 낸들 혁신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김 부총리가 청와대에서 혁신 성장을 위한 노동개혁을 강조하던 그 순간에 민주노총 산하 건설노조 조합원 1만2000명은 건설근로자법 개정을 요구하며 마포대교 남단을 무단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퇴근길 시민들이 벌벌 떨며 다리를 걸어서 건너야 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과연 이 정부가 규제와 노동 개혁이라는 산을 넘어 혁신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만한 능력과 의지가 있을까. 그리하여 ‘안 돼 공화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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