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8] 반란인가? 구국항전인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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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0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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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새 계기 만든 쿠빌라이․왕전의 만남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고려가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것은 1253년쯤으로 그 해에도 예구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해왔다. 이후에도 몽골의 고려 침공은 이어지면서 오랜 전란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은 더해가고 국토는 더욱 더 피폐화 돼가고 있었다. 대장경을 만드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지만 당장은 가피력이 나타날 조짐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몽골의 사정도 변해가면서 점차 지긋지긋한 전쟁을 마무리 짓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의 고비가 되는 것이 대칸 뭉케의 죽음이었다. 뭉케의 죽음은 쿠빌라이와 고려의 태자 왕전의 만남을 가져왔고 그 것이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새롭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팔만대장경의 제작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부처의 힘이 그러한 안배를 해 놓은 것이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 34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
원종이 자리를 비운 동안 임연(林衍)이 죽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권력을 이어 받았다. 그 역시 아버지 임연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 받아 몽골군과 맞서 싸울 것을 선동했으나 전쟁에 지친 조정과 백성 대부분은 동조하지 않았다.

[사진 = 강화해협]

임씨 정권 때문에 다시 곤란한 지경에 빠질 것을 우려한 그의 자형 홍문계(洪文系)등이 원종의 후원아래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임유무 일당을 제거했다. 임유무가 제거된 지 사흘 후 원종은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몽골과의 화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몽골의 속국이 되는 출발점이었다. 1270년 11월의 일로 몽골이 고려를 침공한지 39년째 되는 해였다.

▶ ‘삼별초의 난’이냐? ‘구국 항전’이냐?

[사진 = 삼별초 관련 문서]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에 큰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물론 객관적인 자료 등을 바탕에 두고 나름대로 판단하겠지만 어디에다 무게를 두고 어떤 자료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 그래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뒤 3년 남짓 동안 이어지는 삼별초의 항전에 대한 해석도 그 차이가 심한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이라고도 하고 ‘삼별초의 항몽(抗蒙)’이라고도 하는 것도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생긴 해석인 것 같다. 필자가 역사학도도 아니고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다각도로 깊게 분석해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기량도 부족한 탓에 학자적인 접근은 어렵다. 하지만 삼별초의 행동을 보통 사람의 눈으로 읽어본다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것을 가르는 것은 삼별초가 항전에 나선 동기와 항전에 나선 이후의 행동이 아닐까?

흔히들 삼별초의 3년간에 걸친 항몽을 ‘구국의 항전’ 또는 ‘호국 투쟁’ 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외세의 침입에 대항해 목숨까지 버려가며 끝까지 저항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삼별초가 당시 고려 조정의 뜻에 따르지 않고 저항의 길로 나선 동기를 보면 처음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대의를 가지고 시작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석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 개경환도 반대한 삼별초
일단 여몽전쟁을 사실상 3년이나 연장해간 삼별초의 저항 과정을 보자. 고려왕조가 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이에 동조하지 않고 반기를 든 세력이 바로 삼별초다. 그래서 이들의 항쟁으로 몽골과의 전투는 아직 한고비를 남겨 놓고 있었다. 이들의 항쟁을 나라 對 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고려인과 몽골군 간에 전투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진 = 신안 해저 유물선]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한 뒤 30여 년간 임시 도읍지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강화도에서는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조정을 따라 뭍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삼별초에 속한 무신들이었다.

▶ 무신정권 전위대로 특권과 횡포
삼별초는 원래 최씨 무신정권 시절에 최우가 조직한 선택받은 군대였다. 밤에 개경 경비를 위해 조직된 야별초(夜別抄)가 그 시작이었다. 이 야별초의 수가 많아지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쪼개지고 여기에 몽골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신의군(神義軍)이 보태지면서 삼별초라 불렀다. 이들은 원래 사병들이 아니었으나 무신정권이 이들에게 특권을 주며 사병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신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이들은 특권의식에 젖어 횡포를 부리는 일이 잦았다. 갖가지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삼별초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기 위해 녹봉을 후하게 주고 사사로이 혜택을 베풀었다. 또 죄인의 재산을 몰수해 나눠주기도 했다. 김준이 최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제거하는 데는 모두 삼별초의 힘을 빌렸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삼별초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를 짐작할만하다.

▶ 특권상실에다 처벌 우려로 반란

[사진 = 삼별초 진도 이동]

하지만 무신정권이 무너진 데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이러한 특권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특권은커녕 이제 삼별초의 지휘관들은 무신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일로 처벌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원종이 삼별초의 해산을 명하고 명부를 가져오게 하자 삼별초는 그 명부가 몽골군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해 더욱 반심(叛心)을 품게 됐다.

삼별초의 반란은 이런 배경 아래서 일어났다. 배중손(裵仲孫), 김통정(金通精)등 삼별초 지휘관들은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들은 고려조정의 親 몽골적인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일반 백성들의 정서를 부추겨 反 몽골세력을 규합했다.
 

[사진 = 배중손 열전(고려사)]

"몽골군이 침입해 백성들을 마구 죽이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다 모이라."고 외치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크게 모였다고 고려사 배중손전(裵仲孫傳)은 기록하고 있다.

▶ 화친 반대세력 대거 합류, 진도로

[사진 = 진도 앞바다]

강화도가 개경에서 가까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이들은 근거지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진도(珍島)로 옮겼다. 천여 척의 배가 사람과 물자를 싣고 남쪽으로 떠났다. 귀족이나 고위 관리들은 배에 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배에 탄 사람은 모두 삼별초와 몽골에 항쟁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사진 = 진도]

비록 명부가 몽골군의 손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한 것이 항쟁을 택한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그 동안 몽골과의 항쟁에 앞장섰던 천민을 비롯한 백성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이들의 목표는 오직 몽골과 싸워서 이긴다는 한가지로 모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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