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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6] 청산별곡에 담긴 뜻은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7-12-07 09:11수정 : 2017-12-07 09:11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 숀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 백성의 고초와 한이 담긴 노래

[사진 = 악장가사]

대중가요로도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고려 가요 청산별곡이다. 악장가사(樂章歌詞)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전해지고 있는 청산별곡은 앞에 소개한 5연과 함께 모두 8연으로 이어진다. 그저 자연에 묻혀 살고 싶어 하는 민중의 정서를 담은 노래로 이해하기 쉬운 이 청산별곡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는 몽골의 고려 침공 당시 전란을 피해 이리 저리로 떠돌며 겪었던 백성들의 고초와 정서가 담긴 한의 노래라는 해석도 있다. 이 노래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면 그러한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사진 = 청산별곡]

머루랑 다래랑 먹으며 지내는 청산에서의 삶은 민초들이 스스로 선택했던 삶이 아니라 몽골의 약탈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삶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연에 나오는 우는 새는 울고 싶은 그들의 심정을 새에 비유한 것이다. 3연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 물속에 잠긴 새를 보고 있다는 표현으로 희망이 사라진 어두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4연은 산성 입보민의 고적한 삶을 나타내며 ‘어디로 던진 돌인고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고..’ 하는 의미로 이어지는 5연에서는 지도층의 분란으로 상처 입은 민초들의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미상인 청산별곡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로 엇갈리고 있지만 몽골의 침공 관련한 해석도 충분히 눈여겨 볼만하다.

▶ 끈질기고 철저한 민중 항전

[사진 = 고려민중 항몽전 참여]

수십 년의 전쟁 동안 고려가 보인 항전 태세는 몽골군으로서는 어느 전쟁터에서도 겪어 보지 못했을 만큼 끈질기고 철저한 것이었다. 그 것도 정규 부대의 저항만이 아니라 전 민중에 나선 범국가적 차원의 저항이었다. 이러한 항전을 두고 자주국가의 면모를 과시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당시 몽골에 대한 항쟁에 나섰던 민중들에게 충주성의 김윤후가 했던 것처럼 사기를 올려주는 조치를 취하고 이들의 힘을 조직화해서 고려 조정이 적극적인 항전에 나섰다면 당시 무적의 몽골군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자주국가 면모를 과시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청산]

하지만 몽골군에 맞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은 지방의 군과 농민 그리고 천민들이었다. 몽골군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준 사람도 초적과 노비들이었다. 또한 전쟁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이들 일반 백성들이었다. 청산별곡에 나타나 있듯이 산 속에 피해 살면서 고난과 어둠의 세월을 보낸 것도 민초들이었다.

▶ 희생 늘린 강수만이 능사였나?

[사진 = 고려민중 항몽전]

이처럼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이 황폐화되는 동안 무신정권의 주도자들은 강화도에 피해 지내면서 화려한 집을 지어 놓고 안락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항상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상황을 급박하게 몰아갔다. 수십 년 동안 민중이 희생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동안 오로지 강수(强首)만 구사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몽골군에게 항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탄력적인 대응과 외교적 수완 발휘를 통해 나라와 백성의 희생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사진 = 무너진 산성]

특히 몽골 측에서 봐도 오랜 기간에 걸쳐 희생이 적지 않은 전쟁에 염증을 내며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적절한 방법이 있을 법도 했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 강경책만 고수한 것은 정권유지만이 최선의 목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따른 피해는 섬 안에 피해있는 그들에게는 나중의 일이었다. 강경책은 다른 잡음은 잠재웠겠지만 그에 따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시킨 꼴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항전을 두고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항전이었다고 추켜세우는 것에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전란 중 무리한 대장경 조조(粗造)
사실상 백성들을 내팽개친 채 섬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무신정권이 결과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은 팔만대장경을 만든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전쟁으로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고 굶어 죽는 사람까지 속출하는 판국에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서 밀고 나간 이 사업은 당시로 볼 때는 적절한 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진 = 축성에 동원된 강화주민]

불력(佛力)에 힘입어 전쟁의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나라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대장경을 새기는 일로 나타났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아 몽골군의 침략이 중단되지도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을 주도한 최씨 정권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찬란한 유산으로 남은 팔만대장경

[사진 = 팔만대장경 현판]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적인 자긍심과 나라에 대한 믿음을 결집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평가할만하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그 후부터 지금까지의 일이다. 특히 팔만대장경 제작과정에는 당시 고려인들의 지혜와 과학적인 우수성 그리고 장인 정신 등 여러 가지 신비로운 요소들이 담겨져 있다. 또 팔만대장경을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해 온 과정 역시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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