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한담冬夏閑談] 충(忠)의 수평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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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호 전통문화연구회 회원
입력 2017-11-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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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남용으로 완전히 '맛이 간' 말을 상투어라 한다. ‘사랑’ ‘우정’ ‘행복’ ‘추억’ 같은 말을 누가 들먹이면 닭살 돋을 것 같고, 그 사람 맨 정신인가 싶다. ‘의리’는 조폭 전용어가 되다시피 해 보통 사람이 쓰면 이상하다. 이런 말은 코미디의 우스개, 형식적인 주례사, 축사 같은 데서나 명맥을 유지한다.

'충성(忠誠)' '충효(忠孝)'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상투어이다. 왕조시대 유학이념 때문에 그 의미가 경직됐고,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반감을 부추기는 말로 전락했다. 이 말을 들으면 상명하복, 수직관계만 있던 예전 군대, 학교, 직장을 연상하며 마음 불편한 이들이 많다.

그때마다 유교와 공자 그리고 논어가 일차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며 이유를 대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상투어의 비극이다.

논어 첫 편 ‘학이’ 4장에는 증자(曾子)가 매일 여러 가지로 반성하는데, 그중 "남을 위해 일하면서 충성스럽지 않았는가(爲人謀而不忠乎, 위인모이불충호)"라는 대목이 있다. 어떤 학자의 말대로 아직 군신 또는 상하관계로 ‘충’이 굳어지기 이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충성은 충성이어서 편치 못하다.

하지만 ‘남을 위해 일한다’는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금이나 상관을 위해 일한다’가 아니다. 즉, 위아래만 있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남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평적 관계도 포함된다. 여기에 이웃, 친구, 동료 등을 대입하면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

주자(朱子)는 유교를 공자보다 더 엄숙하고 근엄하게 정리했다는 비난도 받는데, ‘충’에 대한 풀이는 좀 다르다.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盡己之謂忠, 진기지위충)"이라고 했는데, 이를 증자의 말에 넣으면 "남을 위해 일하면서 내 마음을 다했는가"쯤 된다. 여기서 ‘충’은 친근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준다.

누가 나에게 부탁한 일을 하는 도중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주 물으면 결과는 두말할 필요 없다. 실천이 매우 어려운 덕목이지만, 이를 묵묵히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그래서 남다른 인간미와 향기를 지닌다.

그 다음 자신의 일을 하면서 물어보는 것이다. 이건 남을 위한 일보다 더 힘들다. 일하는 순간순간 이렇게 점검하면 삶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작은 예로 상대방 말을 끝까지 경청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걸 제대로 실행해 본 적이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라.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충’이다. ‘충’은 일상의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자기 마음을 다하는 행동지침이지, 멀고 높은 데 있는 불편한 괴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친근하고 인간다운 말이 유통기한이 다 된 상투어가 돼 버렸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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