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칼럼] 덕수궁 돌담길의 달려라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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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입력 2017-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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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칼럼]

 

[사진=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덕수궁 돌담길의 달려라 라디오!

결혼 3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들어 왔다는 50대 부부. 남편과 함께 듣겠다며 부인이 신청한 노래는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슬프고 괴롭고 힘겨워하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독이는 내용의 이 명곡은 그곳의 사람들 가슴 속 깊이 울려 퍼졌으리라.
45년 만의 첫 방송 출연이라고 자못 의미를 부여한 서울 이촌동에 산다는 한 중년 남성. 20년 전 아내와 걸었던 이 길을 두 딸과 함께 걷고 있다며 이 길에서 청혼가로 불렀다는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당신은 나의 모든 것(You're my everything)’을 신청했다. 그는 “그 때는 정말 지금의 아내가 그랬다. 나의 모든 것이었다”고 말해 청중의 폭소를 끌어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나온 ‘사랑의 길’답게 이 곳에는 커플도 많았다. 자신을 24살 대학생이라고 밝힌 청년은 두살 연상의 여친과 돌담길 데이트 중이라며 울릉도에서 군 생활할 때 나눈 편지에 들어 있었던 프랭키 밸리(Frankie Valli)의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Can't take my eyes off you)’를 선곡했다. 열애중임을 여실히 드러낸 이 커플이 ‘차이와 변화를 다루는 예술’이라는 결혼에 골인하기를 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며느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로 가을맞이 데이트 나왔다는 안국동 사는 시어머니는 정인의 ‘오르막길’을 골랐다.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가 시작되자 눈을 감고 음미하는 이들은 이 고부만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옛일을 추억하며 돌담길을 걷고 있다는 일단의 중년여성들이 입모아 신청한 노래는 이곳과 제격인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혼자 무작정 걷다가 소싯적 노래가 흘러나와 들어왔다는 중년여성은 톰 존스(Tom Jones)의 ‘딜라일라(Delilah)’를 원했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아내의 고향인 한국을 찾았다는 한 미국인은 냇 킹 콜의 ‘고엽’을 아내에게 헌사했다. 회사에서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돌담길을 서성이다가 노래에 이끌려 찾아왔다는 어느 젊은 직장인과 “수능을 앞둔 고3 언니들을 응원합니다”를 외친 한무리의 이화여고 학생들···. 낙엽이 뒹굴고 추색이 완연한 이 곳에는 저마다 사연과 추억을 간직한 수백명의 사람들이 라디오를 매개로 웃고 울고 행복해 했다. 이곳은 ‘돌담길 라디오 2017’ 현장. 지난 11월8일부터 18일까지 장장 열하루 동안 덕수궁 돌담길에는 라디오 이동 스튜디오가 꾸려져 생방송이 나갔다. 한데로 나왔지만 관악FM과 마포FM 두 공동체라디오는 물론 페북라이브와 팟빵에 생중계되고 돌담길 현장에서도 주파수 100.3Mhz로 잡히는, 어디 책잡을 수 없는 엄연한 라디오 방송국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주최하고 두 공동체라디오와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시청자미디어센터가 공동 주관한 이 라디오 축제는 서울시민이 직접 디스크자키(DJ)가 되어 방송을 진행하거나 사연과 신청곡 등으로 방송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 고안되었다.
어르신과 청소년, 장애인과 다문화여성 등 각계각층의 시민이 진행한 '나도DJ존'과 서울지역 마을미디어 단체가 제작·진행한 '마을존', 라이브공연이 함께 펼쳐진 '뮤직존'과 '인디존' 등의 편성띠로 마련된 방송에는 재야의 숨은 고수들이 전문 진행자 뺨치는 실력을 뽐내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통해 스튜디오 한 편에 세워진 사연나무의 은행잎 엽서에 적힌 사연과 신청곡이 전파를 탔다.
일반 시민이 대부분 진행했지만 명사가 나온 '셀렙존' 시간은 재미와 묵직한 울림을 동시에 주었다. 17일 셀렙존 ‘라디오위드스타’에 나온 정지영 영화감독은 지난 4월에 열렸던 부산국제단편영화제 심사에서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봤는지의 독창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며, 삶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이끌어가기 위해 영상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이탈리안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만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전편에 흐르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신청하며 이 갱스터 걸작과 함께 ‘시네마 천국’과 ‘미드나잇 카우보이’를 내 인생의 영화로 꼽았다.
15일 셀렙존에 등장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과 김영배 성북구청장은 ‘길과 도시’에 대한 철학을 청중과 나누었다. 제주에 올레길을 만든 서 이사장은 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너무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리기만 해 심신이 망가지고 있다며, 혼자 길을 나서 동행을 만나고 길 위의 꽃과 새와 나무가 말을 거는 체험을 해보라고 권했다. 이에 김 구청장은 ‘성북 한바퀴’길 위에서 주민들의 삶에서 우러나는 알곡같은 얘기를 듣고 있다며 한 정치인의 철학이 어떻게 도시를 바꾸고 있는지를 ‘보고타 개혁’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내전과 범죄 등으로 지옥 같았던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는 엔리케 페날로사 시장이 예산을 자전거 도로와 공원, 보행 광장, 도서관, 학교, 보육시설 건설에 집중 투입하면서 행복도시로 탈바꿈했다. 페날로사 시장이 역점을 둔 정책이 범죄나 빈곤과의 전쟁이 아니고 금융업과 부동산 개발은 더더욱 아닌 자동차와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모든 시민의 경험을 존중해 도시를 디자인하고 자원을 쓰면 시민의 삶이 윤택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이것은 16일 셀렙존에 나온 유은혜 의원(더불어민주당)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화로도 이어졌다. 박 시장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누구를 위한 곳인지 결정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힘으로 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며, 이런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공동체라디오와 마을미디어 같은 매체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막토크쇼에 나온 정찬형 tbs 교통방송 대표는 아날로그 매체인 라디오가 디지털 시대인 지금도 사라지기는커녕 꿋꿋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이유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쌍방향 매체라는 점을 꼽았다. 김현정 CBS PD도 라디오에서는 음악 프로그램은 물론 시사프로그램도 따뜻한 방송인 데다가 디지털기술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며 밝은 미래를 점쳤다. 스마트폰 앱을 통한 청취가 늘어나고 다른 분야와 결합하는 현상은 라디오의 시공간 장벽을 없애고 소통의 거리를 더욱 좁히고 있는 것이다.
2017년은 한국에 라디오 전파가 터진지 90년이 되는 해다. 올해 처음 열린 돌담길 라디오가 적어도 10번째, 라디오방송 100주년까지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 라디오에는 우리네 삶이 있고 공동체의 미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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