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8] 대도의 흔적은 얼마나 남았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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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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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칸이 사는 도시 칸발릭

[사진 = 대도성 유적지]

원대한 꿈이 담겨진 몽골 제국의 수도 대도는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도시가운데 하나다. 몽골인들이 세운 인공적인 도시가 오늘날 세계인들로부터 주목받는 도시 가운데 하나인 북경이 됐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대도가 마르코 폴로에 의해 ‘칸발릭’ 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유럽에 알려지면서 동경의 대상이 되는 도시가 됐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이 ‘칸발릭’을 찾아 모험의 항해에 나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더욱 드물 것이다.

‘칸발릭’은 칸이 사는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투르크어로 당시의 대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지금은 인구 천만 이상의 국제도시가 된 북경의 거리를 오가는 숱한 사람들과 이 도시를 찾는 외국인들 가운데 이 도시의 뿌리가 북방 몽골인들의 구상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 대도의 흔적은 얼마나 남았나?
이방인들이 남긴 흔적을 끊임없이 지워온 중국인들이 과연 기념비적인 도시인 대도의 흔적을 얼마나 남겨 놓고 있을까? 카라코룸이나 상도의 경우를 보더라도 후세의 중국인들은 몽골인들이 남긴 흔적을 보존하는 데 그리 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을 들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면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대도의 흔적이지만 그래도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아본다면 무언가 남아 있지 않을까?

▶ 몽골 고원에서 멀지 않은 북경

[사진 = 북해공원]

몽골의 국경도시 자민우드에서 북경까지는 천 Km 전후가 된다. 자동차로 달리면 열 시간 이상 걸린다. 몽골과 중국의 국경선을 넘어서더라도 북경까지에 이르는 대부분 지역은 지형적으로는 몽골에 가깝다. 과거 몽골의 땅, 내몽골 지역이기 때문이다. 북경에 가까운 곳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지형도 중국의 대륙의 지형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북경은 과거 몽골의 땅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몽골과 중국의 국경도시를 출발해 10시간 이상 980킬로미터를 달려서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경에서 대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가 본 곳이 쿠빌라이가 게르를 짓고 지내면서 대도 건설을 구상했던 곳, 서화담과 경화도였다.

[사진 = 유원지의 북경시민]

그 곳은 지금은 북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북경시민들의 휴식처가 돼 있다. 경산공원도 북해공원과 거의 맞닿아 있는 또 하나의 북경 시민들의 안식처이자 휴식공간이다. 이 경산 공원에 올라서면 자금성과 북해공원 등 옛 중국의 역사를 이끌어간 고궁들을 발아래 두고 한눈에 볼 수 있다.

▶ 동물들이 노닐던 궁궐 정원

[사진 = 경산공원 일대]

높이 92미터의 동산처럼 생긴 경산공원은 쿠빌라이가 경화도에 게르를 짓고 지냈을 당시에는 호수 곁에 있던 조그마한 흙 동산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매산(煤山)이라고 불렀는데 매(煤)는 석탄을 가리키는 말로 북경이 적에게 포위 됐을 때 연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석탄을 쌓아두고 그 위에 흙을 덮어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것이 호수에서 파낸 흙이 이곳에 쌓이면서 더욱 커졌고 만세산(萬歲山)이란 이름이 붙여진 인공산(人工山)이 됐다. 이 만세산은 대도가 지어진 후에는 궁궐 안에 자리 잡은 정원이자 동물원이었다. 마르크 폴로가 묘사한 당시의 경산은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두 성벽의 사이에는 잔디밭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어 흰 숫 사슴과 사향노루, 황갈색 사슴, 다람쥐를 비롯한 각종 아름다운 동물들과 진기한 동물들이 뛰어 다닌다. 성벽 안에 있는 모든 공간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들 아름다운 동물들로 가득 차 있다."

경산은 이후에도 계속 황실의 정원으로 가꾸어져 학과 사슴 등이 무리를 지어 다녔고 명나라 때에는 황제들이 이곳을 사냥을 하거나 화초를 감상하는 곳으로 삼기도 했다.

▶ 어경의 장소 경산

[사진 = 북해공원 연꽃]

이 산에 경산(景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청나라 건륭 16년인 1758년, 당시 이곳에 5개의 정자를 지으면서 이름도 아예 바꾸어 버렸다. 아마도 황제와 황후 등 황실의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먼 곳을 관망하던 어경(御景)의 장소로 활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이 인공산은 한 정권이 무너지던 상징적인 장소로도 역사에 기록돼 있다.

실정(失政)으로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1644년 이자성이 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북경성이 함락되자 처와 자식을 살해하고 이곳 경산에 올라 홰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기 전에 그는 비상종을 울렸지만 누구 한사람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인심을 잃은 정권의 비참한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줬다. 이 산 동쪽에 있었던 그 홰나무는 문화혁명 당시 응징해야 할 4가지의 옛 것,즉 舊사상, 舊문화, 舊풍속, 舊습관으로 몰려 베어 없어지고 말았다.

▶ 즐거움이 가득한 삶의 현장

[사진 = 북해공원 놀잇배]

명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황실의 공원으로 이용됐던 경산공원은 지금 서민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많은 동물들이 평화롭게 나다니던 경산공원에는 지금은 동물 대신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 소리, 서로 어울려 춤에 열중하는 사람들, 중년을 넘어선 사람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나이든 이 곳 사람들의 얼굴에는 즐거움과 기쁨의 웃음이 가득했다. 이곳은 살아 움직이는 중국인들의 삶의 현장 중의 한 곳이었다.

▶ 흥이 넘치는 노인들의 모임 장소
그들 사이에는 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은 5백 명 가량 되는 곳도 있었다. 리드하는 한 사람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진지해 보였다. 경산공원은 중국의 파고다 공원 같은 곳이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파고다공원이 소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이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데 열중하는 곳이라면 경산공원은 나이 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만들어 즐기는 데 열중하는 곳이었다.

▶ 연무에 뒤덮인 자금성
동쪽에 있는 두 정자, 주상정(周賞亭)과 관묘정(觀妙亭)에 서면 눈 아래 자금성이, 그 오른 쪽으로는 북해 공원이 펼쳐져 있다. 경산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자금성(紫禁城)은 지척이다. 자금성은 잘 알려진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이 된 곳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가 서린 천자의 궁궐이다. 중국에서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세상, 즉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을 하늘의 아들 천자라 부르고 그 도읍지를 땅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관념이 있다.
 

[사진 = 경산공원서 본 자금성]

그 같은 관념은 일본도 비슷해서 천황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천자의 궁궐이라는 의미의 자금성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북두칠성의 가장 북쪽에 있는 자미성(紫微星)에서 따왔을 것이다. 자색은 천자를 의미하는 색깔로 자금성을 덮고 있는 상서로운 자줏빛 기운을 자운(紫雲)이라고 했던가? 경산공원에서 내려다 본 자금성 하늘은 희뿌연 연무로 가득 차있었다.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자금성의 모습은 흐릿하다. 아무리 봐도 자금성을 덮고 있는 연무는 상서로운 기운인 자운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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