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4] 쿠빌라이는 왜 과소평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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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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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정통성 확보가 큰 과제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쿠빌라이는 사실상 쿠데타를 통해 대권을 잡았다.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 항상 그 짐을 벗어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안간힘을 쓴다. 특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집권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노력을 해온 것을 우리나라의 가까운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쿠빌라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쿠빌라이도 정통성을 확보한 뒤 全몽골제국의 대칸으로서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거대한 제국의 통치자 역할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왕지사 대칸의 자리를 움켜잡았는데 그런 꿈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모든 일족이 참여하는 쿠릴타이를 열어 모두의 축복 속에 대칸의 자리에 취임하고 싶어 했다. 그래야만 과거 일방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 취임을 선언한 불명예스러운 흠을 지우고 명실공이 제국의 대칸으로서 위치와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 쿠릴타이 개최에 관심 고조

[사진 = 울란바토르 교외 韓人농장]

쿠빌라이는 우선 쿠데타라는 불명예를 벗어버리기 위해 제국 내 세 명의 유력자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그런데 첫 방문지인 차가타이家에서 수장인 알루구로부터 제국 전체를 망라한 大쿠릴타이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다. 쿠빌라이로서는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과 같은 반가운 제안이었다. 쿠빌라이의 속마음을 알고 있던 알루구가 미리 선수를 쳐서 호의적인 제안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어 일한국의 훌레구와 주치 울루스, 즉 킵차크한국의 베르케를 차례로 방문한 사절단은 즉각 大쿠릴타이 개최를 제의했다.

당시 관할지역을 두고 대치 상태에 있었던 훌레구와 베르케는 자칫 그 제의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자신만 고립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참가를 조건으로 쿠릴타이 개최에 찬성했다. 이제 제국의 최고 관심사는 2년 뒤인 1266년에 열릴 大쿠릴타이로 모아지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아마 전체 칭기스칸 일족이 참여하는 통일된 에케(大)쿠릴타이가 열리면 오고타이 이후 30년 동안 계속된 혼란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대칸 아래 통합된 새 몽골 공동체를 발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계 역사의 물줄기는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알 수 없다.

▶ 세 유력자의 잇단 죽음

[사진 = 1260년대 몽골제국]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이미 다른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만일이라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大쿠릴타이가 열리기도 전에 세 명의 유력자가 차례로 죽어버린 것이다. 늙어서 병사한 것도 아니고 한창의 나이에 줄줄이 죽은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역사의 전환기에서 핵심 인물이 갑자기 죽는 것도 몽골 제국의 전통인가? 아무튼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일한국과 차가타이한국, 킵차크한국의 우두머리인 훌레구와 알루구, 베르케가 모두 사라졌다.

이들 세 지역이 새 지도자를 뽑는 일에 몰두하면서 제국의 서쪽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들 지역에게 대쿠릴타이를 여는 것은 한발 건너의 일이었다. 자연히 대칸인 쿠빌라이의 명령에 따라 제국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 물론 대칸으로서의 쿠빌라이의 지위는 그대로 살아 있었지만 각 지역이 마이 웨이(my way)를 선언하고 제 갈 길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 쿠빌라이도 새로운 방법의 통치 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 노년에 권좌에 오른 쿠빌라이
쿠빌라이가 쿠데타로 대칸의 자리에 오른 것은 46살 때였다. 동생 아릭 부케와의 제위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 그로부터 4년 뒤였으니까 쉰 살이 돼서야 비로소 진정한 대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쿠빌라이는 이미 노인이었다. 요즘 같으면 쉰 살이면 한참 일할 나이다.
 

[사진 = 나담 축제 가는 몽골인]

그런데도 몽골의 유목민들은 지금도 쉰 살이면 노인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몽골인들은 노화가 빠르다. 그들이 노화가 빠른 것은 채소를 거의 먹지 않고 육식으로 일관해 온 식생활의 탓이 가장 크다. 거기에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심한 이동생활과 거의 햇볕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목축생활이 나이 보다 훨씬 더 빨리 노화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결혼하는 조혼의 관습도 노화를 촉진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은 나이가 들면 정주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 보다 10년쯤은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경우가 보통이다.

▶ 탁월한 경영자이자 노련한 통치자

[사진 = 전통복장의 몽골인]

그런데 쿠빌라이는 몽골인으로서는 거의 황혼기로 접어드는 쉰 살에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몽골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다. 30년 동안이나 대칸의 자리에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그는 80살인 1294년 타계했다. 그러니까 쿠데타이후 4년을 합친다면 무려 35년 동안 제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세계제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 마르코폴로, ‘王中王’ 칭송

[사진 = 마르코 폴로 초상화]

쿠빌라이의 모습에 대해서는 마르코 폴로가 그의 기행문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는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다. 쿠빌라이 아래서 관리로 일했다고 주장하는 마르코폴로는 ‘쿠빌라이는 단정한 용모를 지니고 있고 혈색이 좋으며 수족이 고르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언급은 남겨진 쿠빌라이 초상화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쿠빌라이의 초상화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온화하고도 건강해 보이는 평범한 노인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 안에 감춰진 탁월한 지도력과 치밀한 계획성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자질 등은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마르코 폴로는 “아담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세상에 나왔던 사람과 땅과 보물의 가장 강력한 주인”이라고 추켜세우며 그를 왕 중 왕(王中王)이라고 칭송했다. 물론 마르코폴로의 허풍과 과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상의 칭찬이 아닐 수 없다.

▶ 포장할 소재 부족했던 쿠빌라이

[사진 = 칭기스칸과 손자 쿠빌라이]

칭기스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몽골을 세계제국으로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쿠빌라이의 마무리 작업이 없었다면 훨씬 낮게 매겨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칭기스칸에 비해 상대적으로 쿠빌라이에 대한 역사적 포장이 크게 부족하다. 그가 거의 중년을 넘긴 나이에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됐다.

또 탄생에서부터 젊은 시절에 이르는 생의 전반기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여기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쿠빌라이에 관한 모습은 칭기스칸이 호레즘 지역에서 대규모 사냥을 벌였을 때 11살의 나이로 짐승을 잡아 할아버지에게 보여주는 집사에 그려진 한 장면뿐이다.

이에 비해 칭기스칸은 탄생에서부터 우여곡절 끝에 초원을 통일하고 세계까지 정복한 과정이 몽골비사를 통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충분히 영웅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을 소재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쿠빌라이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할아버지에 비해 삶의 극적인 순간이 적은데다 포장할 소재가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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