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이정은 시대’…효心이 부른 ‘독종’

[이정은의 우승 세리머니. 사진=KLPGA 제공]

프로 골프 선수에 대한 선입견은 강하다. 부유한 집안에서나 가능한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올곧이 골프채를 잡은 ‘늦깎이’ 골퍼가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를 접수했다. KLPGA 역사상 6번째 선수로 개인 타이틀 ‘4관왕’을 싹쓸이 한 이정은6(21)이 그 주인공이다.

이정은은 지난 12일 마감한 KLPGA 투어 2017시즌의 ‘여우주연상’이다. KLPGA 투어 역대 8번째, 선수로는 6번째로 대상(691점), 다승왕(4승), 상금왕(11억4905만2534원), 평균타수 1위(69.80타) 등 개인 타이틀 전관왕(4관왕)을 달성했다.

지난해가 박성현이었다면, 올해 ‘대세’는 이정은이었다. 롯데렌터카 여자오픈, 문영 퀸즈파크 챔피언십,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 등 4승을 수확한 이정은은 올해 27개 대회에 출전해 단 한 번도 컷 탈락 없이 준우승 4차례를 포함해 20번이나 톱10에 입상했다. 한 시즌 최다 톱10 신기록이다. 또 OK저축은행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에선 12언더파 60타를 쳐 KLPGA 투어 18홀 최소타 기록을 14년 만에 갈아치웠고, 평균타수 부문 역대 3위에 올랐다.

주변 사람들은 이정은의 성장 속도를 보면 ‘무섭다’고 말한다. 박성현도 “작년에 본 이정은과 올해 본 이정은이 완전히 달라져 놀랐다”고 말할 정도다. 이정은은 초등학교 때 취미로 골프를 하다 그만두고 중학교 3학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골퍼가 목표가 아닌 여성 세미프로라도 되겠다는 각오였다. 먹고 살기 위해 골프채를 놓지 않는 ‘생계형’ 골퍼가 목적이었다. 절박한 환경은 그를 채찍질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2015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뒤 3부, 2부를 거쳐 1부 투어 출전권을 따냈고, 2016년 신인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올해 사고(?)를 쳤다.

이정은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 이정호씨가 운전하는 장애인용 자동차를 타고 투어 생활을 한다. 골프장에서 휠체어에 탄 아버지를 밀어주는 딸의 모습도 쉬이 볼 수 있다. 이정은을 만든 것은 바로 효심이 부른 ‘독종’ 근성이다. 이것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샷의 비결이다.

올 시즌을 마친 뒤 ‘대세’를 만끽한 이정은은 “올해 목표는 상금 10위 안에 드는 거였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게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차다. 누구보다 행복한 2017년을 보냈다”고 웃었다.

하지만 겸손했다. 벌써 내년 걱정이다. 잘한 것보다는 아쉬운 게 더 많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2018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고민이다. 기대하는 만큼 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각오다. 아직 고쳐야 할 것이 많다. 잘한 것은 맞지만, 우승 기회를 놓친 것도 많다. 아직 부족하다.” 이정은은 내년 시즌까지 100m 이내 웨지샷과 퍼팅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국내 무대를 평정한 박성현은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마저 접수했다. 하지만 이정은은 아직 미국 무대 진출 계획이 없다. 이정은은 “아직 미국 진출을 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다. 내년이나 내후년 미국 진출을 위한 계기가 될 터닝 포인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며 “당장 내년 목표는 올해 4관왕을 한 개인 타이틀 중 하나라도 2연패를 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