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130년사⑧] ‘벽돌건축 장인’ 화교…한국 근대 성당 도맡아 공사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입력 2017-11-09 13:03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아주차이나·인천대 중국학술원 공동기획

  • 종교건축물과 건축청부업

서울 명동성당의 정면 모습.[사진=이정희 교수 제공]

서울 명동성당 내부의 모습.[사진=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서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북 전주 전동성당, 대구의 계산성당·성모당·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전북 익산 나바위성당(화산성당), 경북 칠곡 가실성당,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 이들 성당과 가톨릭 관련 건축물은 한국의 중요한 근대유산으로 가톨릭 신자는 물론 일반인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성당 건축물의 설계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소속으로 조선에 온 외국인 선교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성당건축이 완성되려면 훌륭한 설계도면만 있어서는 안 된다. 설계도면에 근거해 건축 재료를 활용해 공사할 수 있는 건축회사와 직공(기술자)이 필요하다.

이들 건축물은 화교 건축 기술자가 직간접적으로 참가해 시공한 것과 붉은 벽돌 혹은 회색 벽돌을 사용한 벽돌조적의 건축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화교가 이들 벽돌조적 종교건축의 시공에 참가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당시 조선의 건축물 가운데 벽돌건축물은 거의 전무한 상태로 벽돌의 제조와 벽돌조적의 기술을 보유한 직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벽돌 제조와 조적의 기술을 가진 일본인 건축 기술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화교 건축회사와 기술자가 그들보다 더 많이 채용 및 동원된 데는 그들만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건축 기술자로 1907년 당시 경성YMCA 건축 공사의 주임감독으로서 화교 직공의 작업태도를 관찰한 가네코 세타로(金子政太郞)는 화교 건축회사 및 직공의 경쟁력을 일본인과 비교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 사이는 주종의 관계로 화기애애한 가족경영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 둘째,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의 작업 태도가 매우 성실하다는 점. 셋째, 직공은 공사 감독자의 지시에 순종하고 공기(工期)를 예정보다 빨리 마무리 한다는 점. 넷째, 화교 직공의 임금이 조선인과 일본인에 비해 저렴해 공사 수주 가격이 싸다는 점. 대체로 화교 건축회사는 일본인 건축회사 수주가의 70~80%로 공사가 가능했다. 이러한 공사가 가능한 것은 화교 직공의 싼 임금이 근저에 있었다. 다섯째, 화교 직공은 벽돌조적과 석공 기술이 조선인과 일본인에 비해 우수했다는 점.

미국 남장로회의 스와인하트(Swinehart) 선교사는 광주와 순천지역의 개신교 관련 건축물을 거의 모두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15년 간 화교 건축청부업자와 같이 공사를 한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장점을 세 가지로 소개했다.

첫째는 직공의 선택과 재료의 사용에서부터 완성까지 전반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고 실행력이 높다는 점. 둘째, 건축 자재를 스스로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도난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미국의 일반적인 착실한 건축회사의 활동과 비교적 유사하다는 점. 가네코 세타로와 스와인하트가 지적하는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의 장점이 거의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명동성당은 근대 한국 종교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2년 5월 8일부터 공사가 시작돼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이 거행될 때 까지 약 6년에 걸쳐 완성됐다. 이는 서울의 약현성당의 공사가 1891년 10월 21일부터 1892년 11월 6일까지 약 1년에 그친 것과 비교된다. 약현성당은 이후 소형 성당건축, 명동성당은 대형 성당건축의 모델이 된다.

명동성당의 벽돌쌓기는 1892년 7월 27일부터 시작됐는데 공사는 화교 벽돌조적공이 담당했다. 성당의 벽은 붉은 벽돌을 쌓고 그 사이사이 버팀벽을 회색 벽돌로 쌓아 좋은 효과를 내려 했다.

화교 벽돌조적공이 사용하는 벽돌은 성당 근처 벽돌공장에서 직접 구워낸 것으로, 벽돌 제조도 화교 벽돌제조공이 담당했다. 당시 성당 시공에 참가한 화교 직공은 벽돌제조직공 4명, 벽돌조적공 22명, 총26명이었다.

화교 및 조선인 벽돌조적공의 공사 감독은 화교 진(陳)베드로가 담당했다. 그는 산둥(山東)성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 조선대교구 뮈텔 주교의 큰 신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진베드로는 명동성당 완공 후 서울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의 건축을 담당했다. 1897년 8월 시작된 이 공사는 1900년 9월 8일 완공됐다. 이 건축물의 직공은 명동성당 시공 참가자가 그대로 맡았다.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의 85주년지에는 “이 집을 지을 때 명동 대성당을 짓던 청국 사람인 베드로라는 열심인 교우에게 맡겼다”고 언급돼 있다.

대구 계산성당 정면 모습.[사진=이정희 교수 제공]

대구 성모당의 모습.[사진=이정희 교수 제공]


진베드로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이 완공된 후, 1901∼1903년에 건축된 대구 계산성당의 시공에 참가했다. 계산성당은 1899년 원래 한옥형 성당으로 건축됐지만, 현재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된 상태다. 로베르 신부가 설계한 계산성당은 진베드로의 감독으로 공사가 진행됐다.

이 공사에는 화교 직공 28명이 참가했으며, 조선인 직공과 같이 공사를 했다. 진베드로는 1909년∼1910년에 건축된 횡성의 풍수원성당 시공에도 참가했다.

조선의 가톨릭은 조선대교구가 설립된 후, 1911년 서울과 대구대교구로 분리됐다. 프랑스인 드망즈 신부가 1911년 6월 대구대교구의 교구장으로 부임한 뒤, 대교구에 걸맞게 각종 가톨릭 관련 건축을 시공했다.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대구대교구의 ‘건축의 시기’라 할 정도로 각종 가톨릭 건축물이 세워졌다. 설계는 프랑스인 신부, 시공은 대체로 화교 건축회사인 쌍흥호(雙興號)가 맡았다.

1930년 10월 화교 건축회사는 46개소에 달했다. 전체의 약 4할은 서울과 인천에 집중돼 있었으나, 대구에도 2곳이 있었다.

주요한 화교 건축회사는 서울의 복음건축창(福音建築廠), 쌍흥호, 사도소(司徒紹)와 강조인(江兆仁) 경영의 건축회사였다. 대구의 쌍흥호는 서울 쌍흥호의 지점과 같은 곳으로 경영주는 강의관(姜義寬)이었다.

강의관은 1910년대 대구로 이주해 드망주 주교의 신뢰 속에서 대구 대교구의 대부분의 성당 건축물 시공에 참가했다. 그는 화교 벽돌조적공과 함께 김수한 추기경이 다닌 성유스티노신학교의 건축 시공에 참가하고 제대의 석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성바오로 수녀회의 코미넷관을 시공했다. 코미넷관의 1층은 예배실과 유아원, 2층은 침실, 지하는 식당 및 창고로 사용됐으며 지금도 보존이 아주 잘 돼 있는 편이다. 대구 대교구의 자랑인 성모당(聖母堂),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계산성당의 증축공사도 강의관이 이끄는 쌍흥호 및 화교 직공이 참가했다.

강의관은 중국 산둥성 황셴(黃縣) 출신이었다. 그는 당시 대구부 남산정(南山町) 190번지에 위치한 쌍흥호를 경영했다. 대구 쌍흥호는 당시 전국의 화교 건축회사 가운데 7번째로 규모가 큰 회사였다.

그는 가톨릭신자로 중국식 세례명은 강방지거(姜方濟各), 한국식으로 하면 강프란치스코였다. 진베드로와 같이 그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20년 4월 쌍흥호에 새로운 직원이 한 명 채용된다. 이름은 모문금(慕文錦). 그는 강의관과 동향인 산둥성 황셴 출신이었다. 그는 1904년 황현의 사숙(私塾)에 입학하고 1912년 12월 12일 사숙을 휴학한다.

1913년 3월 15일 서울로 이주해 정동에 있던 쌍흥호의 서기로 취직하고, 쌍흥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915년 4월 1일부터 설계사로 승진한다. 1920년 4월에는 대구 쌍흥호의 책임지배인으로 취직하고 경영자인 강의관 밑에서 쌍흥호의 각종 시공에 참가했다. 강의관과 모문금이 함께 시공에 참가한 것이 확인되는 건축물은 경북 칠곡군에 있는 가실성당이다.

가실성당의 신도인 조선인 강라파엘은 이때의 성당 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동선(투르뇌) 신부는 먼저 벽돌을 구울 중국인 기술자 7~8명을 초청하고 가실 현지에서 중국인 모씨를 감독으로 해 성당 건축에 사용할 벽돌을 구웠다. 다른 중국인 강씨를 총감독으로 공사가 재개됐다. 구운 벽돌이 다 준비되자, 중국인 건축기술자들이 벽돌을 쌓아올려 성전과 사택 건물을 지었다.” 여기서 ‘중국인 강씨’는 바로 강의관이며, ‘중국인 모씨’는 모문금이다.

화교 건축회사와 직공이 가톨릭 건축물만 시공한 것은 아니었다. 화교 건축회사 경영자인 모문서(慕文序)는 서울 승동교회(1913), 평양 숭실전문학교(1928)을 지었다. 해리 창(Harry Chang)은 서울 YMCA회관(1908), 서울 새문안교회(1910), 그리고 왕공온(王公溫)은 대한기독교서회(大韓基督敎書會), 이화여대 본관 및 캠퍼스 내 각종 건축물(1933~1936)을 각각 시공했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일본 교토(京都)대에서 동양사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화상연구중심의 특별초빙연구원(교수)으로 재직 중이다. 화교사 및 동아시아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화교와 근대 동아시아’(일본어, 단저)와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공저) 등 다수가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아주NM&C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