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반도체에 철학이 사라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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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입력 2017-11-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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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산업부 차장

권오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은 평소 임직원들에게 반도체를 ‘철학적 물질’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도체는 전자의 흐름으로 전기를 통하는 기능에 만족하지만 반도체는 양전자와 음전자의 결합을 이루는 것인 만큼, 동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음양의 조화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권 회장은 "이 같은 조화를 이용해 작은 것에서 원하는 속성을 만들어 내고 필요한 기능을 이루도록 한다"고 반도체의 매력을 꼽는다. 또한 자신이 반도체 산업에 투신하게 된 이유라고도 한다.

이런 권 회장의 철학은 불교경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심경)’의 명구인 “색불이공공불이색 색즉시공공즉시색(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 명구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는 의미다.

반도체의 주 재료로 쓰이는 실리콘(Si)의 원자핵은 양자 14개와 중성자 14개로 구성되어 있다. 14개의 전자는 K궤도에 2개, L궤도에 8개, M궤도에 4개 등 총 3개의 궤도에 걸쳐 있다. 원자와 각 궤도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사실상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실체가 없다고 쳐도 무방할 정도의 공간이다. 여기서 전자가 쉴틈 없이 이동하면서 물질적 현상을 만들어낸다.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의 결합으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실로 엄청난 성과다.

199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는 로트피 자데 미국 버클리대 교수의 ‘퍼지 이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자데 교수는 현실세계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모델을 찾다가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닌 애매모호한 정보를 다루는 퍼지이론을 구상, 1965년 학계에 발표했다. 20여년 후, 느닷없이 동양에서 퍼지이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서양문화는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하는 반면, 동양의 철학은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을 모두 인정하는 ‘퍼지적’인 측면이 있다"며 "퍼지는 동양문화의 산물이었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이분법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국말의 ‘두서넛’ ‘예닐곱’ ‘여남은’ 등 숫자 개념뿐 아니라 ‘대충’ 등 일상어만 봐도 한국인들은 애매모호함을 받아들였다. 적당주의와 대충주의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넉넉함과 유연성을 가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융통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문에 기술적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활로를 개척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저력은 이 같은 퍼지적 사상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반도체 산업은 종주국인 미국과 산업으로 키워낸 일본에 비해 늦게 출발했지만 결국 이들 국가를 따라잡고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한국이 서양의 과학학문을 받아들이되, 이를 동양철학사상으로 재해석해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성과를 만들어 냈기에 가능했다. 이를 뒤집어 놓고 보면, 서양의 문화적 우월성에 집중하려는 미국, 패기를 잃은 일본, 동양철학을 스스로 포기한 중국이 앞으로도 한국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에 빠르게 흑백논리 사상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고유의 장점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권 회장이 지적하는 반도체 인재 부족 현상도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창의적 인재를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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