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11월은 꿋꿋이 서서 비우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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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 작가·북칼럼니스트
입력 2017-11-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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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북칼럼니스트]


괜히 11월일까/ 마음 가난한 사람들끼리/ 따뜻한 눈빛 나누라고/ 언덕 오를 때 끌고 밀어주라고/ 서로 안아 심장 데우라고/ 같은 곳 바라보며 웃으라고/ 끝내 사랑하라고/ 당신과 나 똑 같은 키로/ 11/ 나란히 세워놓은 게지(이호준 시인의 시 ‘11월’ 전문).

11월만큼 존재감 없는 달도 없다. 새해가 시작되는 1월과 꽃 피는 춘삼월 사이에 낀 2월과 비슷하다. 그나마 2월은 짧은데다 구정 연휴가 있고 봄으로 가는 희망도 실려 있다. 바로 앞 10월은 ‘어느 멋진 날’에 만나 사랑하다 ‘마지막 밤에 눈물의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지는’ 상사화(相思花)의 달이다. 바로 뒤 12월은 흰 눈 사이로 징글벨 울려 퍼지는 사이 올해도 무사히 살아냈다는 세밑의 훈훈한 발걸음들이 있다.

10월과 12월 사이에 낀, 삭풍의 길목 11월 이것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다. 존재감이 없다 보니 시인도 가수도 11월에게는 별 감흥이 없다. 월급쟁이들은 더하다. 명절이나 국경일 등 소위 ‘빨간 날’ 하나 없어 달갑지 않다. 12월은 어차피 파장이라 연간 실적에 쫓기는 영업사원들의 마음은 더욱 심란하다. 월급쟁이들에게 11월은 ‘1+1=중노동’의 달일 뿐이다.

낙엽이 구르는 11월의 거리는 을씨년스럽다. 손가락으로 톡 치면 팡 터지며 푸른 잉크가 흐를 것 같았던 10월의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중충해진다. 갑자기 닥치는 영하의 추위로 사람들의 목은 이전에 없던 자라목이 된다. 한겨울을 따뜻하게 날 준비를 해야 할 가난한 이웃들에게 11월은 근심걱정의 달이다.

이런 처지의 11월이라면 참 억울하기도 하겠다.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 없듯 11월은 자기가 11월이고 싶어서 11월인가. 그런데 과연 11월은 이리 미운 오리새끼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알고 보면 11월은 다른 어느 달도 가지지 못한 묵직한 가치들을 사정없이 내포하고 있다.

11월은 끝과 시작이 함께 있는 격동의 달이다. 나무들은 효율적으로 겨울을 버티기 위해 잎으로부터 모든 영양분을 줄기로 회수한 후 잎을 버리는 구조조정에 착수한다. 그리하여 가지가 휘어지도록 쌓이는 폭설과 빙하의 칼바람도 이겨낼 마음의 각오를 다지며 꿋꿋이 직립한다. 그 곳에서 겨울을 버티어 낸 나무는 봄이 오면 11월에 회수했던 양분을 밑천 삼아 새로 잎을 내 왕성한 광합성으로 훌쩍 성장한다. 11월에는 ‘비워야 채운다’는 그 단순하고 위대한 진리가 들어 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게 아주 쉬운 원숭이 사냥법이 있다고 한다. 원숭이가 손바닥을 폈을 때 들어갈 만큼 입구가 작은 구멍을 나무에 뚫는다. 또는 입구가 작은 항아리를 원숭이들이 사는 곳에 가져다 둔다. 물론 그 안에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가 들어 있다. 이를 발견한 원숭이는 ‘이게 웬 떡이냐’ 손을 불쑥 넣어 바나나를 한 움큼 집고서 손을 빼내려고 한다. 그러나 주먹을 쥐어 커진 원숭이 손은 들어갈 때와 달리 그 구멍을 빠져나올 수 없다. 원숭이가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길은 손에 쥔 바나나를 놓는 것이지만 원숭이는 날이 밝도록 바나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탐욕으로 인해 스스로 인간에게 생포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이렇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원숭이와 호모사피엔스보다 먼 인류의 조상은 원래 네 발로 나무 위를 옮겨 다니며 함께 살았었다. 그러다 뒷다리는 길어지고 튼튼해지면서 앞다리는 짧아져 팔이 된 원숭이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땅에서 살기 시작했다. 두 발로 나란히, 꼿꼿이 서서 걷는 직립보행의 영장 인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곧추 서서 나란히 걷는 두 발의 모양은 11이다. ‘1+1=두 발’의 11월인 것이다. 직립으로 무리 지어 살면서 부족을 이룬 털복숭이 원숭이들 사이에 영토 전쟁이 시작됐고, 사회와 권력체계가 도입됐다. 부족사회를 이끌던 수컷 우두머리 곁에는 늘 매혹적인 암컷 원숭이들이 함께 있었다. 젊은 암컷과 수컷들은 발정기와 성욕의 신체적 특징을 감출 수 없었다. 감히 우두머리의 짝을 보며 발기하는 속내를 들킨 졸개 수컷은 두렵고, 민망했다. 또 암수 둘은 공히 부끄러웠다. 방법은 나뭇잎이나 커다란 조개 껍질로 성기를 가리는 것이었다. 인류가 옷을 입고 도덕과 윤리의 개념을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11월은 또한 사회적 인류의 달이기도 하다.

다 접고, 11월은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달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16일 치러진다. 먼먼 인생길 나아가며 이 나라를 책임질 청춘들이 인생 중간결산을 하는 운명의 달이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점수가 안 나와 절망하는 청춘들아! 나는 끝내 너희들의 친구이고 싶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절대 아니란다. 살아보면 알게 된다. 포기하지 마라.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고, 실패는 바느질 할 때나 필요한 말이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지는 절대 끝난 게 아니란다. 이 또한 살아보면 안다. 하여 모든 수험생들에게 복 있을진저!

그런데 누가 11월을 을씨년스럽다 했는가! 시인과 가수들이 11월은 홀대해도 첫눈은 환대한다. 그 첫눈이 내리는 달이 11월이다. 지난 여름 손톱에 빨갛게 물들였던 봉숭아 꽃물이 아직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난다는 전설의 첫눈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 사람 오지 않는’ 연정을 품은 달이 또한 11월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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