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안주고(按酒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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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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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맛과 멋의 고장 전주는 예부터 술집 인심이 후하다. 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키면 이런저런 안주는 덤이다. 권커니 잣거니 술잔 기울이다 보면 어언 안주가 떨어진다. “주모, 아직 술이 남았는데~.” “옜소!” 서비스 안주가 제법이다. 이제는 술이 떨어진다. “주모, 안주가 많이 남았는데~.” “옜소!” 술항아리에서 한 됫박 퍼 준다. 그렇게 대폿집 정취는 무르익는다.

“먹는 것으로 이문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다. 먹고 살며 아이들 학교 보낼 수 있으면 충분했다. 그 전통일까. 삼천동 막걸리 촌이 유명해진 것은. 한옥마을을 거쳐 찾아온 외지인들은 막걸리 한 주전자에 상다리가 휠 듯 곁들여 나오는 산해진미 안주에 탄성을 지른다. 시쳇말로 ‘가성비’ 으뜸이다.

막걸리뿐이랴. 전주의 ‘가맥’은 대구의 ‘치맥’만큼이나 유명해졌다. 가게에서 파는 맥주인데, 비결은 바싹 구워낸 북어와 황태, 하얀 분이 묻어나는 갑오징어 안주에 있다. 즉석에서 구워 바삭한 식감도 일품이지만, 달콤매콤한 장맛은 형언하기 어렵다. ‘백문 불여일식(百聞 不如一食)’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법이다. 술도 그렇다. 안주가 곁들여져야 제격이다. 안주 없이 마시는 ‘깡 술’은 주도(酒道)를 그르치기 쉽다. ‘깡 술’은 사전에 ‘강술’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나온다. 접두사 ‘강-‘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문으로 ‘강(깡)소주’를 드는데, 안주 없이 마시는 소주란다.

글쎄다. ‘깡’은 명사로 ‘깡다구’와 같은 말이다. 악착같이 버티어 나가는 오기를 뜻한다. 그러니 ‘깡 술’은 두둑한 배짱과 오기로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이라고 하는 것이 쓰임새에 맞지 않은가. 깡다구가 여간해서는 감히(!)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실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안주(按酒)의 한자 뜻이 묘하다. '안'(按)은 ‘(손으로)누르다, 억누르다’는 의미이다. 훈(訓)도 ’누를 안, 막을 알’이다. 따라서 안주는 술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술을 ‘억누르는’ 것이다. 아무리 취하려고 마시는 게 술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순식간에 취해서야 주흥(酒興)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겠나. 

주량이 만만치 않았던 ‘반 잔의 미학’ 주창자 다산 정약용은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다”고 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구토를 하고, 곧바로 잠에 곯아떨어지면 술에서 우러나는 깊은 정서와 흥취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산은 특히 구토를 혐오했다. 농부들이 피땀 흘려 수확하고 주방에서 정성껏 요리한 음식물을 게우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라 했다. ‘밥(음식)이 하늘’이라면, 체화(體化)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토하는 것이야말로 역천(逆天) 아니겠나.

모든 음식물의 꿈은 체화되는 것이다. 즉, 입으로 들어가 위와 장을 거치면서 신체의 일부로 흡수되는 것이다. 굽이굽이 창자를 거치면서도 흡수되지 못한 음식물은 항문을 통해 배출된다. 똥이 슬픈 것은 그 수많은 분절과 연동 과정을 거치면서도 끝내 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똥에게는 기회가 있다. 유기농법을 통해 식물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입으로 향하는 것이다. 토사물은 다르다. 땅에서 비롯돼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공들임이 도로아미타불, 헛수고(徒勞)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구토의 한자도 묘하다. ‘게울 구(嘔)’는 ‘몸 구(軀)’에서 입(口)만 남은 형상이고, ‘토할 토(吐)’는 입(口)이 땅(土)에 닿은 모습이다. 입으로 들어간 것을 삭이지 못하고, 입이 땅에 닿을 듯 몸을 굽혀 입 밖으로 내놓는 것이 ‘구토’이다.

청(淸)나라 말엽 관리들은 나라 이름과 달리 탁(濁)했던 모양이다. 만주족과 한족의 유명 요리를 한데 모은 '만한전석'(滿漢全席)에 갖가지 백주(白酒)를 즐겼다. 3박4일에 걸쳐 나오는 요리이다 보니 일부러 게워내야 모두 맛볼 수 있었다. 화려한 상차림 옆에는 퇴식(退食) 항아리와 침 뱉는 타구(唾具)가 마련됐다. 먹고 토하고, 마시고 뱉는 주연(酒宴)이다. 로마도 말기에는 상류층들이 먹고 토하는 연회를 즐겼다고 하니 이 또한 '역천자망'(逆天者亡)인가.

소동파도 적벽부에서 질펀한 술자리를 묘사한다. “객과 더불어 잔을 씻어 서로 술을 따르니 안주와 과일이 다 떨어지고, 술잔과 소반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더라.” '배반낭자'(杯盤狼藉)가 여기서 유래했다. 

우리네는 소박함을 꼽았다. “금 술잔의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요, 옥 쟁반의 고기 안주는 백성의 기름이다(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고 경계했다. 그래서 선비들은 풋고추에 김치로 효핵(肴核)을 대신하고, 남산골 딸깍발이는 빈 젓가락 들고 수염에 탁주를 묻혔다. 그런데 술잔을 뜻하는 한자가 묘하다. 나무 배(杯)이든, 그릇 배(盃)이든 ‘아닐 불(不)’이 붙었다. 혹여 많이 마시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일까.

지기를 만나면 천 잔의 술도 적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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