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진칼럼] 청산과 협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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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 논설고문
입력 2017-10-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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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진칼럼]
 

        [사진=허남진 논설고문]


청산과 협치 사이

적폐 청산과 협치. 문재인 정권의 핵심 공약이자 개혁과제다. 쌓여온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내고, 모두가 힘을 합쳐 나가겠다는 이 개혁과제의 성공적 실행 여부에 문 정권의 성패가 달린 셈이다. 그러나 전망은 그리 녹록지 않다.
적폐 청산과 협치는 그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잘사는 공정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지고(至高)의 지향점이라고 할 때 그 길로 가기 위한 수단이자 과정이라는 성격이 더욱 짙다. 수단이나 과정은 여의치 않을 경우 수정 보완하거나 생략될 수 있다. 최종 목표를 위해선 상황에 맞춰 유연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능변여상(能變如常)의 지혜다.
그런데 작금의 분위기는 목표와 수단이 뒤바뀐 느낌이다. 적폐 청산이 특히 그렇다. 검찰이 칼을 휘두르고 당청은 꽹과리를 두드리며 온 나라를 ‘과거 때려잡기’로 몰아간다. 이전 정권을 사갈((蛇蝎)시하며 전방위적으로 옥죄고 있다. 이미 사회정의를 위한 수단이란 차원은 넘어선 지 오래다. 전 정권을 혼내주려고 정권을 잡은 건가. 의문이 들 정도다.
공세가 거칠고 거세니 반발 또한 사생결단식이다. 고이 잠든 노무현 대통령이 현실정치판에 불려나오고 부엉이 바위로 연결되는 민망한 이야기들이 재론되고 있다. 내년도 국가 살림과 미래의 먹거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할 국회 국정감사장은 노무현-이명박 난도질판으로 둔갑했다.
MB정권의 각종 불법 비리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잘못은 잘못대로 엄히 처벌돼야 마땅하다. 특히 정권안보 차원에서 행해진 국정원의 일부 어처구니없는 행각들엔 말문이 막힌다. 철저한 수사와 함께 국정원 바로세우기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문제뿐 아니라 방송·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MB정권의 논란 이슈들이 일제히 들춰지고 있으니 순수한 적폐 청산 작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어디까지 몰고가려는 것일까.
댓글부대들은 박근혜 대통령 구속 이후부터 “이젠 MB 차례”라고 인터넷을 도배질해왔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MB를 검찰 포토라인에 세우지 못하는 상황이 올까 걱정”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한다. MB에 대한 미움이 하늘을 찌른다. 노 대통령 자살은 MB의 표적수사 탓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또 널리 퍼져 있다. 그 원한을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보복 심리가 짙게 배어나온다.
현 정권의 적폐 청산은 MB를 정조준한 인적 청산과 직결돼 있다. 잘못된 관행이나 시스템을 수리하고, 탈법·불법·비리의 뿌리를 뽑아내자는 작업과는 동떨어졌다. 취임 초부터 강조하고 있는 '협치' 또한 말뿐이다.
진정한 적폐 청산이란 여당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입법을 통해야 확실하고도 실효적인 청산이 뒷받침되는데, 이는 여야의 협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소야대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협치 없이 보복성 인적 청산에만 매달리니 그 결과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청산과 협치의 거리가 너무나 멀다.
여권 인사들은 우리 사회 갈등과 분열을 앞선 두 차례 보수정권의 책임이라고 탓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MB와 박근혜 두 대통령은 국회를 외면한 잘못이 크다. 야당 및 반대세력을 상대로 대화와 타협을 시도조차 하지 않아 소통 정치에 실패했다. 방송 장악이라고 비난받을 소지도 없지 않고,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비판에서도 일정 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보수 세력들은 대결 정치의 원조는 자신들이 아니라 두 차례의 진보정권이라고 맞받는다. 특히 노무현 정권 코드인사들에 의한 편가르기 행각이야말로 골 깊은 반목의 주인(主因)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방송과 문화 정책은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과정’이었단다. 당시 몇몇 친노 열성인사들의 야비하고도 적개심 넘치던 언행을 돌이켜보면 보수층이 느꼈을 위기의식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보수-진보-보수-진보 정권으로 몇 차례 바통이 넘겨졌으면 정-반-합의 역사발전이 이뤄지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결과는 엉뚱하다. 서로에 대한 퇴행적 미움만 눈덩이처럼 쌓이고 커졌다.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을 배출하면 패자를 품어야 마땅하다고 배웠거늘 거꾸로 날 선 보복이 춤을 춘다. 마치 무협소설 속의 협객들 같다.
보복은 보복을 낳는다. 지금의 정의가 시대가 바뀌어 불의로 뒤집어질 수 있다. 모두의 불행이다. 보복 정치의 악순환 고리는 끊어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 정치로 되돌아가야 한다. 토론과 협상의 협치가 실천에 옮겨져야 하고, 인적 청산이 아닌 적폐 청산으로 방향이 되돌려져야 한다. 청산작업 또한 빨리 끝낼 필요가 있다. 사회적 논의가 '씻고 털어내고 도려내자는' 가학적·부정적 틀에 머물러 있다면 불행이다. ‘극복하고 개발하고 발전하는’ 생산적·긍정적 화두로 바뀌어야 된다.
특히나 지금은 엄중한 비상시국이다. 북핵을 둘러싼 안보와 성장 동력을 잃어가는 경제가 심각한 위기다. 이러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불안하다. 인공지능(AI)에 의한 4차 산업혁명시대에 뒤처지고 있다는 경고도 귀가 따갑게 들린다.
시절이 하 어수선하니 국가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던 박정희식 완력의 리더십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 시절을 답습한다는 건 시대착오적 퇴행이겠지만, 그때처럼 국민 역량을 결집시키는 특단의 대책이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자면 그에 앞서 서로에 대한 미움을 털어내는 대화합의 어울림 한마당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 무대는 승자가 솔선해 꾸려야 한다. 피해 의식이 크면서도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라고 자평하는 현 정권이 먼저 마음을 열어주길 바란다.
엊그제 전달된 한 스님의 카톡 말씀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면 정말로 자세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미움은 결국 자신의 마음 탓이라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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