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한담冬夏閑談 김영죽칼럼] 조선시대 검서관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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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죽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입력 2017-10-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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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한담冬夏閑談]

조선시대 검서관과의 만남

김영죽(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榮忝爛藜筆 부끄럽게 자리 올라 내각의 붓 빛냈으니
誠微補袞絲 정성 미약하나마 임금 말씀 보좌하리라
                                  강진(姜溍)

이 두 구절은 '규장각 검서관직에 임명되어 느낀 바를 쓰다(拜 奎章閣檢書之官直中志感)'라는 시의 일부분으로, 조선시대 검서관(檢書官)이었던 강진(姜溍)이 지은 것이다. 검서관이라는 직업도, 강진이라는 이름도 낯선데, 현 시대에 뜬금없이 임금님 보좌는 또 웬 말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검서관은 정조가 만든, 이른바 규장각에서 서적이나 문서들을 관리하던 직책이다. 강진은 검서관을 지냈던 시인으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던 표암 강세황의 서손(庶孫)이기도 했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전통시대의 그 정서가 우리에게 와닿는지의 여부는 잠시 옆에 밀어둔다 하여도, 과연 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충심(?)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사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은연중에 충성을 요구한다. 2017년의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예속되어 지하철 인파에 시달리면서 출근하지 않는가. 새로운 차별, 보이지 않는 계급을 이고 진 채로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 자존감과 안정된 생계까지 지키며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행운이란 흔치 않다.
조선시대 검서관도 30개월을 임기로 하는 일종의 비정규직이었다. 그럼에도 강진은 검서관에 임명되자 기쁨에 겨워 시를 써내려갔다. 서얼 출신으로 오를 수 있는 최상의 직업이기도 했고, 화려한 누대와 귀중한 도서들로 가득찬 규장각은 더없이 좋은 근무 환경었을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규장각의 정식 관원들을 보좌하여 도서 편찬과 간행에 관련한 일들에 시달렸으며 궁궐 안팎의 행사 준비에 수시로 불려다녔다. 특히 며칠에 한 번씩 궐내에서 숙직하는 일은 이들의 업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예로 꼽힌다. 검서관 생활은 명예롭기는 하지만 과중한 업무량이나 박봉과 같은 현실적 문제가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적어도 프로라는 자부심과 명예라도 있었다. 업무를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은 비단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경제 구조를 달리하는 이 시대에 그들처럼 명예와 자부심만으로 버텨내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고용 구조 해결 방안은 이슈가 되어왔으나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불안함과 서러움이다. 일자리 창출에 앞서 우선시해야 할 고민은 ‘사람다운 대우’이다. 검서관을 버티게 했던 것이 바로 자존감이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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