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수칼럼] 추석,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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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수 언론인
입력 2017-10-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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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수칼럼]

 

         [사진=손병수 언론인]


추석, 그 후

“얘야, 좀 일어나거라. 인사해야지.” 어머니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을 때 사방이 깜깜했다. 쪽문으로 이어진 작은집 가게 쪽으로 나갔을 때 흐릿한 가로등 아래 짐칸에 포장을 친 트럭이 보였다. 작은아버지는 내 아버지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늘 ‘작은엄마’라고 불렀던 숙모는 어린 딸을 업은 채 사촌 아우들을 트럭 짐칸에 올려 태우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사촌 아우들도 짐칸에 올라탄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어머니의 재촉에 “안녕히 가세요” 인사만 꾸뻑 했던 것 같다. 이내 트럭이 떠나고 방에 돌아왔을 때는 새벽 네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작은집은 서울로 갔으니 그리 알고 다시 자거라”고 하신 후 담배를 물고 마루로 나가셨다.
오랫동안 기억 속에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는 그날의 모습이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추석을 얼마 앞둔 즈음이었다. 없는 살림에 제법 자주 돌아왔던 제사며, 명절 차례를 늘 함께 지낸 작은집 식구들이었다. 사촌 아우들은 초등학교도 같이 다니다 보니 종종 다투고 삐지기도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가득한 사이였다. 명절이면 세배도, 성묘도 함께 다녔고, 차례상에 오른 쌀밥과 고깃국을 함께 즐겼던 아우들이었다. 며칠 후 추석이 돌아오고, 우리 집 차례에 온 친척들 가운데 작은집 식구들만 빠진 것을 보고 새삼 그들과의 이별을 실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무렵엔 작은아버지가 장사에 실패해 빚을 많이 져서 갑자기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을 나도 알게 됐다.
그 후, 사촌 아우들이 명절에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10년도 훨씬 지난 다음이었다. 그동안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여러 차례 작은집을 찾기도 했다. 갈 때마다 주소가 바뀌었다. 면목동에서 구로동, 인천 간석동에서 다시 가리봉동 등 일이 있으면서 월세가 싼 곳을 찾아 이사를 다녔다. 고단하고 남루한 삶이었다. 작은아버지 내외와 5남매 합쳐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시절에는 나는 잘 곳이 없어 아버지가 보내온 돈이나 물건을 전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나마 사촌 아우들은 공장에서 철야를 밥 먹듯 할 때여서 얼굴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숙모는 늘 ‘우리 장조카, 장조카’하며 아껴주던 나에게 밥 한끼를 차려주고는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해마다 좋아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명절에 고향을 찾는 발길을 통해서였다. 처음엔 기차표를 겨우 구해 오더니 곧 이어 작은 승용차가 등장했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사촌 아우들이 하나 둘 결혼하며 식구가 늘자 최고급 승용차에 미니버스까지 동원해서 당당하게 내려왔다. 그때쯤 고향의 빚을 모두 갚은 작은아버지는 사촌 아우들이 만든 회사의 회장 명함을 파셨고, 숙모는 귀한 모피코트를 입으셨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작은집 식구들이 부자 흉내만 낸 것은 아니다. 숙모님은 고향 방문이 끝나면 다시 억척 주부로 돌아가서 50명 남짓 공장 식구들의 밥을 손수 지어 먹였다. 한 트럭 분량의 김장을 담그느라 고무장갑 끼고 동분서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우들 역시 봉제하청업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직접 매장을 열었으며, 나중에는 홈쇼핑 채널에 진출하기도 했다.
야반도주하다시피 떠났던 그날에 한이 맺힌 작은아버지가 “곧 고향에 번듯한 집을 짓고 노후를 보내겠다”고 호언했던 것이 1997년 추석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작은집의 작은 성취와 꿈을 앗아갔다. 그해 사촌아우들은 귀향하지 않았다. 이듬해도, 다음해 추석에도 오지 않았다. 공장을 정리했고, 애지중지하던 부동산도 처분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아우들은 다시 공장에 취직하거나 재고로 떠안은 봉제품을 팔러 전국을 떠돌았다. 5년쯤 지나 그들이 추석에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때, 그들은 중고 승용차 편으로 새벽녘에 도착했다가 차례만 지내고는 “일하러 가야 한다”며 총총히 떠났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바뀌어 이제는 나와 사촌 아우가 각각 제사와 차례를 모시고 있다. 작은아버지 내외는 10여년 전에 돌아가셨다. 잠시 영화를 보셨지만, 고생과 회한이 가득했던 삶이셨다. 올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미리 마련해둔 선산의 작은아버지 내외분 옆자리에 묻히셨다. 이번 추석 열흘쯤 전에 사촌형제들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벌초를 같이 했다. 이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모두 떠나신 마당에 두 분이 나란히 잠드신 산소를 자식들 손으로 벌초 한번 해드리자는 내 제안에 아우들이 흔쾌히 따라나섰다. 사촌 큰아우는 “그동안 아버지 원망을 참 많이 했는데, 오늘 처음 벌초를 직접 해드리니 마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가 추석날 다시 전화를 했다. 올 초까지 미련을 갖고 있던 봉제업은 아주 정리했으며, 며칠 전에 영업용 택시 운전면허를 땄다고 말했다. “봉제업이 인건비 장사인데 물건은 안 팔리고 최저임금은 잔뜩 오르니 더 이상 감당이 안 된다”고 했다. 47년 전 그렇게 고향을 떠난 후 학교 대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아우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그날 이후 정말 죽어라 일하고 살았어요. 열심히만 하면 저절로 잘살게 될 것으로 믿었지요. 그런데 IMF 외환위기도 그렇고, 세상은 번번이 우리 같은 무식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더군요. 정권을 좌파가 잡든 우파가 잡든, 뭔가 나쁜 것은 결국 서민들이 뒤집어써요. 이번 정부요? 별 기대 안 해요. 그나마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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