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삼성의 ‘전문경영인’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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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입력 2017-09-2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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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산업부 차장

“이야기해 봐라.”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생전 계열사 사장들을 호출해 던진 첫마디다. 사장이 전하는 설명을 들은 뒤에는 “왜 그런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또 질문했다. 다 듣고 난 뒤에는 “그것만 하면 다 되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앞뒤 설명 없는 여섯 글자의 질문을 던진 호암의 속내에 대해, 그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손욱 전 농심 회장은 자신의 책 ‘십이지 경영학’에서 “경영자라면 상황 분석을 올바로 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핵심과제를 적어도 3개 정도는 항상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이를 해결할 비전과 전략을 설정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사장단 보고 회의에서 계열사 사장들이 경영실적이 개선됐다고 발표하면 “그런 걸 왜 사장이 보고를 하느냐. 사업이 적자가 나는 건 기업인에게 큰 죄악이지만, 흑자를 냈다고 자랑할 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장이 해야 할 일은 지금 돈을 벌고 있는 핵심사업이 5년 후에도 잘될 것 같으냐를 생각하는 것"이라며 "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뭘 할 것인지 그걸 나하고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경영인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삼성은 글로벌 기업 가운데서도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협업 체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구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삼성은 창업 때부터 전문경영인에 의해 운용됐다.

호암은 1976년 한 언론사에 기고한 글에서 사장을 로마제국 45대 황제인 디오크레티아누스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천민인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를 사람들이 부러워하자, 디오크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렇게 부러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면서 왕좌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자세히 보니까 왕좌 위에는 큰 칼이 가는 끈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황제란 이렇게 늘 무서운 위험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사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다. 아무리 경영을 잘해도 불가항력에 의해 기업이 좌절되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책임은 역시 사장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사장 자신은 그렇게 여겨야 옳다. 따라서 순전한 경영상의 실패로 기업을 큰 위기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사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장이 종전과 다름없는 경영방침을 따른다면, 그 사장도 사장으로서는 실격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장 자리란 오르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도 어려운 것이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그룹 계열사의 수많은 임원들을 대상으로 혹독한 테스트를 치러 전문경영인인 사장 자리에 올린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올라온 그들에게 어느 기업보다 많은 보상을 한다.

하지만 이는 화려한 단면 한쪽만 본 것이다. 보상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은 일반 사람들로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언제라도 끊어질 가느다란 끈에 매달린 큰 칼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위기감을 갖고 일한다.

삼성의 전문경영인들은 오너 못지않은 책임감을 안고 일에 임한다. 이유가 있다. 오너의 약점을 보완해줄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호암은 “삼성 안에는 나보다 식견이 있는 사람도 많다. 나보다 실무에 밝고 경영에 더 능한 사람도 많다"면서 "그러나 나보다 몇 곱 더 훌륭한 인재라 하더라도 그는 나의 뒤를 잇는다는 약점을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 오너들이 전문경영인의 주장이 옳다면 이유 불문하고 받아들이는 이유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조부와 부친처럼 전문경영인들에게 “그 결정이 삼성에 어떻게 중요하죠?”라고 질문하거나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해나가야 할지, 미래는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전문경영인을 믿고, 존중하고, 의견을 담는 스타일은 선대 회장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 여론은 여전히 삼성을 골목가게로 치부하며 이 부회장을 얽어매려 한다. 삼성은 물론 재계 관계자들조차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푸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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