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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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09-1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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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국가1급시설인 칠보발전소를 탈환하고 빨치산을 토벌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가 두 번째로 출동한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은 실로 경이적(驚異的)이었다. 차일혁은 경찰병력으로 75명으로 빨치산 2,500명을 물리치고, 국가시설 제1급인 칠보발전소(七寶發電所, 현 섬진강수력발전소)를 지켜냈다.

 뿐만 아니라 빨치산들이 발전소의 발전시설을 훼손하여 가동이 어렵게 된 것을 엄동설한(嚴冬雪寒)에 간신히 수리하여 남한일대에 전기를 송전(送電)하게 만들었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강원도 영월발전소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직후라 남한지역의 송전을 도맡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차일혁 부대가 위험에 빠진 칠보발전소를 75명이라는 적은 병력을 가지고 수 십 배에 달하는 빨치산을 상대하여 물리치고 그곳을 지켜냈으니, 그 전공(戰功)은 가히 차고도 넘침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을 할 무렵 당시 전황(戰況)은 대한민국에게 있어 최대의 위기였다. 유엔군 작전을 주도하고 있던 미국은 북한 남침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에 대한 해외 망명정부 수립을 적극 검토한 바 있다.

 첫 번째는 낙동강전선의 영천전투(永川戰鬪)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1950년 9월 초였다. 이때 일본 도쿄(東京)의 유엔군사령부에서는 미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통해 정일권(丁一權) 육해공군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게 국군 정예 2개 사단과 정부요인을 포함한 민간인 10만 명을 선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른바 해외망명정부 수립을 위한 유엔군사령부의 사전조치였다. 그러나 영천을 다시 탈환하고 낙동강전선이 안정을 되찾고, 이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자 한국의 해외망명정부 수립은 백지화(白紙化)됐다.

 두 번째는 중공군 개입이후 서울을 공산군에게 다시 빼앗긴 1·4후퇴 때 불어 닥쳤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도선을 돌파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갔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면서 전선은 남쪽으로 급격히 밀려나게 됐다. 38도선이 무너지고 급기야 수도 서울이 공산군에게 넘어가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37도선으로 밀려났다. 이때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해외망명정부 수립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서태평양상의 사모아와 피지, 그리고 일본과 오키나와 등을 염두에 둔 한국의 해외망명정부 수립이었다. 이때가 바로 1951년 1월 상황이었다. 북한 남침 이후 대한민국의 또 다시 국가존립이 위협받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은 국가적으로 매우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벌어졌다. 그런 관계로 칠보발전소는 정부의 입장에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차일혁 부대가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의 명령을 받은 것은 1951년 1월 13일이었다. 이날 전라북도 경비사령부(警備司令部)에서는 차일혁에게 위험에 빠진 칠보발전소에 대한 탈환명령을 내렸다. 그때부터 차일혁 부대는 칠보발전소 탈환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빨치산을 완전히 소탕하는 3월 2일까지 장기작전을 수행했다. 50여 일간에 걸친 차일혁 부대의 칠보발전소 탈환 및 사수작전과 빨치산 토벌작전이었다.

 차일혁은 칠보발전소 탈환을 명령받고,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차일혁 부대는 빨치산 2,500명으로부터 포위된 칠보발전소를 탈환하고, 그 속에 갇혀있던 전투경찰 175명을 구출해 냈다. 둘째, 차일혁 부대는 탈환한 칠보발전소를 빨치산들이 다시 공격하자, 어려운 상황에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지(奇智)를 발휘하여 칠보발전소를 완전하게 지켜냈다. 셋째, 차일혁 부대는 그곳과 가까운 독고봉(獨孤峰)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부대인 ‘기포병단’을 소탕했다. 넷째, 차일혁 부대는 칠보발전소를 확보한 후에는 정읍 산내면 능교리 뒷산에 본거지를 둔 빨치산 부대인 ‘카추샤병단’과 ‘번개병단’을 소탕하고 미수복지구로 남아있던 산내면(山內面)과 산외면(山外面)의 치안을 회복시켰다. 다섯째, 차일혁 부대는 작전지역내 주민들에 대한 선무(宣撫) 및 위무작전(慰撫作戰)을 실시하여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1·4후퇴 후 국군과 유엔군이 37도선으로 남하(南下)함에 따라 후방지역의 빨치산들도 덩달아 날뛰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빨치산들은 남한 지역의 주요 국가시설들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빨치산들이 노렸던 것은 남한 유일의 수력발전소로 전라남북도 충청도지역에 대한 전기(電氣) 공급을 책임지고 있던 칠보발전소였다. 칠보발전소는 남한지역 내 몇 안 되는 중요한 국가1급시설이었다. 이곳을 빼앗기게 되면 남한지역은 암흑의 세계로 변할 것이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전선의 전황이 어려운 때, 칠보발전소마저 빨치산에게 탈취당한다면, 그것이 대한민국 사회에 몰고 올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칠보발전소의 경계는 차일혁(車一赫) 부대의 이원배 경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병력이 그곳으로 파견되어 지키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국가1급시설인 칠보발전소를 탈환하기 위해 완전무장한 2,5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칠보발전소를 완전히 포위했다. 발전소를 지키던 경찰부대는 빨치산의 포위로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 과정에서 실탄과 식량도 떨어졌다. 신속한 증원이 없으면 칠보발전소는 빨치산의 수중으로 넘어갈 위급한 상황이었다.

 칠보발전소에 대한 방어책임을 지고 있던 전라북도경비사령부는 아연 긴장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남한 내 유일한 국가1급시설이자 전북도경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될 칠보발전소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빠졌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급보를 받고 도경(道警)에 모였던 김가전(金嘉全) 전북도지사와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을 비롯하여 정읍출신 국회의원, 스프링스 미 군사고문관, 도경 보안과장과 사찰과장 등이 칠보발전소의 위기상황을 보고받고 곤혹스러워 했다. 칠보발전소를 잃어버렸을 때, 밀어닥칠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전북 도내의 빨치산들은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회문산(回文山)에 빨치산 사령탑인 전북도당사령부(道黨司令部)를 설치한데 이어, 순창군 쌍치면의 가마골에는 지역 내 각종 빨치산 부대들을 규합한 이른바 ‘연합사령부’라는 것을 설치해 놓고 기승을 떨었다. 칠보발전소를 포위한 빨치산들은 바로 그들이 보낸 공비(共匪)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칠보발전소를 탈취하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전북지역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책임 맡고 있던 11사단 13연대도 다른 지역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부대를 출동시킨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칠보발전소에 즉각 출동할 병력이 없었다. 당장 위기에 처한 칠보발전소의 위기를 해결할 부대는 전투경찰뿐이었다. 그것도 뻔했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였다.

 전라북도 경비사령부에서는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에 칠보발전소 탈환명령을 내렸다. 그때가 1951년 1월 13일이었다. 칠보발전소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 차일혁 부대에 달려 있었다. 차일혁은 명령을 받고 출동을 서둘렀다. 그런데 막상 출동하려고 하니 작전지역인 칠보발전소까지 타고 갈 차량이 없었다. 칠보발전소까지는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고, 또 당시 상황이 그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한가한 상황도 못됐다.

 한시가 급했다. 차일혁은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대원들이 타고 갈 차량 5대를 겨우 구했다. 도경비사령부에서 비상용으로 쓰고 있던 쓰리쿼터(3/4톤) 3대, 김제경찰서로부터 트럭 1대, 치안국에서 온 차량 1대를 차출했다. 차일혁은 급히 차출한 차량 5대에 대원들을 실었으나 전 대원들을 전부 태우지 못했다. 겨우 105명의 대원과 전투에 필요한 중화기만을 간신히 실었다. 그리고 칠보발전소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차일혁 부대가 칠보발전소를 향해 출발한 것은 1951년 1월 13일 저녁 7시였다. 칠보발전소는 벌써 빨치산에게 포위된 지 3일이 지나고 있었다. 음력 섣달의 어스름한 초승달빛 아래 영하 9도의 혹한 속을 덮개도 없이 전 속력으로 달리는 차량 속에서 대원들의 몸은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전주에서 작전지역인 칠보발전소를 가려면 김제(金堤)의 금구(金溝)면을 지나 정읍(井邑)의 태인(泰仁)-옹동(瓮東)-칠보(七寶)를 거쳐야 했다. 그런데 차일혁 부대가 타고 가던 차량 1대가 금구면 소재지에 다다랐을 때 고장이 나서 더 이상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차일혁은 어쩔 수 없이 차량에 타고 있던 30명의 부하들을 그곳에 놔두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2,500명의 빨치산들과 싸울 전투경찰 병력은 75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75명으로 칠보발전소를 탈환해야 했다.

 갈수록 차일혁 부대의 상황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꼬여만 갔다. 차일혁은 차량 4대에 75명의 병력을 태우고 칠보로 가는 길목인 태인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이 1월 14일 아침 5시였다. 태인 지서에 들려 지서장으로부터 상황을 청취한 결과, 발전소의 경찰병력은 오래전에 실탄이 떨어져 저항력을 잃고 있었고, 칠보발전소로 연결되는 칠보와 옹동 방면도 빨치산들에 의해 이미 차단된 상태라고 했다. 옹동면과 칠보면 사이에 있는 160고지에도 빨치산들이 점령하고 있어 이곳을 뚫고 가려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차일혁은 옹동지서로 가기 위해 특공소대 16명을 실탄을 적재한 쓰리쿼터에 태운 다음, 적재함 양측에 철판과 모래주머니로 방벽을 만들고 옹동지서로 돌진하게 했다. 희생이 있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빨치산들도 차일혁의 기습돌진에 저항은 했지만 막지는 못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차일혁은 이번에는 본대병력을 3대의 차량에 태워 앞서갔던 특공소대처럼 돌진하여 무사히 옹동지서에 도착했다. 다음은 칠보발전소를 공격할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게 될 칠보지서로 가는 일이 남았다.

 옹동에서 칠보지서로 가는 길은 더욱 위험하고 험난했다. 차일혁이 지형을 관찰해 보니, 옹동에서 칠보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약간 경사진 모퉁이 길이 있었다. 차일혁은 그곳을 이용하기로 했다. 일종의 기만전술(欺瞞戰術)을 쓰기로 했다. 차일혁은 4대의 차량을 빨치산들이 잘 보이지 않은 구부러진 곳에 세운 다음, 1대씩 전조등을 켠 채 출발시켜 빨치산들이 잘 보이지 않은 모퉁이에서 전조등의 불을 끈 후, 그곳에서 뒤로 후진하여 원래 지점으로 돌아오면, 다음 차량이 또 전조등을 켜고 앞으로 출발했다가 모퉁이에서 불을 끄고 후진하는 방식으로 차량 4대를 번갈아 운행함으로써 적이 봤을 때는 수 십대의 차량에 많은 병력이 공격해 오는 걸로 오인하게 했다. 차일혁의 예측대로 빨치산들은 대병력이 공격해 오는 줄 알고 당황하여 포위를 풀고 인근 고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일혁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차량의 전조등을 끈 채 칠보지서로 돌진해 갔다. 칠보지서를 지키고 있던 의용경찰대와 학도병 300명이 환호성을 지르며 차일혁 부대를 맞이했다.

 그때서야 차일혁의 눈앞에 칠보발전소가 보였다. 차일혁이 이제까지 사선을 넘으며 온 것도 바로 칠보발전소를 탈환하기 위해서였다. 차일혁은 칠보발전소 탈환에 마음이 급했다. 그렇지만 병력 차이가 심했다. 차일혁은 이때도 기지를 발휘했다. 지서 주임에게 주민들을 나뭇가지와 풀로 위장하게 하고, 칠보초등학교에 모이도록 했다. 그런 후 제18전투경찰대대 75명은 차일혁의 지휘하에 적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학교에 모인 주민들로 하여금 일정 거리를 두고 공격하는 차일혁 부대의 뒤를 따르게 했다. 이는 칠보발전소를 포위한 빨치산들에게 많은 경찰들이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려하기 위함이었다. 빨치산들은 많은 경찰들이 공격해 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차에 차일혁 부대에서 쏜 박격포탄이 그들에게 떨어지자 칠보발전소 포위를 풀고, 발전소 뒤에 있는 시산리 고지 뒤편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차일혁은 발전소 안에 있던 전투경찰과 연락하여 협조된 작전을 전개했다.

 그리고서 도망치는 빨치산을 향해 차일혁 부대는 추격전을 벌였다. 마침내 칠보발전소 주변의 시산고지, 선왕봉고지, 장군봉, 800고지, 남방고지 등 9개 고지를 순차적으로 탈환한 뒤 발전소에 갇혀 있던 경찰부대와 감격적인 악수를 나눴다. 일부 대원은 환호성을 지르고, 어떤 대원은 차일혁 부대원들을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렀다. 장장 3일간 빨치산들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그들에게 차일혁 부대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대병력이 온 줄 알고 물러갔던 빨치산들이 차일혁 부대가 대부대로 위장했던 사실을 알게 되자, 다시 반격해 왔다. 그때 차일혁은 탄약이 떨어져 대대 보급주임을 전주로 보내놓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야음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차일혁 부대의 실탄은 거의 떨어진 상태에서 겨우 수류탄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탄약차량이 오지 않으면 전멸이었다. 탄약차량이 옹동까지 왔으나, 칠보에 이르는 길목을 빨치산들이 이미 차단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올 수 없었다.

 차일혁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 실탄이 없으면 적탄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끊어지지 않는 전화선을 이용하여 옹동지서에 있는 보급주임에게“실탄을 빼앗긴다 하더라도 칠보로 돌아오라.”고 했다. 보급주임은 “불과 몇 사람으로 포위망을 뚫고,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차일혁은 다시 전화기를 들고, “결사적인 특공대에 의해 교통로를 확보했으니 즉시 출발해라! 돌아올 때는 양쪽에서 지원사격을 해 주겠다.”고 명령했다. 옹동에서 칠보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면 7분이면 족했다.

 전화기를 놓고 나서 차일혁은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았다. 옹동과 칠보 사이에 아군이 교통로를 확보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탄약 차량의 도착만이 수많은 대원들을 살릴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내 앞에 있는 많은 전우들을 위해 부득이한 명령이 아닌가!”그럼에도 차일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차일혁은 빨치산들이 막고 있는 옹동 방향으로 박격포, 경기관총, 소총을 거치해 놓고, 팔목시계를 보며 탄약차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1분, 2분, 3분이 지나자 차일혁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순간 적막을 깨고 모든 화기에서 불을 뿜었다. 일제 사격에 빨치산들은 의아하게 여기며 비켜섰다.

 그 틈을 이용하여 탄약을 실은 차량이 적의 갈라진 포위망을 뚫고 칠보지서에 설치한 대대 지휘소로 돌진했다. 보급주임이 적재함에서 뛰어내리며 “대대장님, 해냈습니다. 실탄을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거수경례와 함께 씩씩하게 보고했다. 그때서야 적들은 탄약을 실은 차량을 향해 사격을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실탄이 도착하자 의기소침했던 대원들의 사기가 되살아났다. 적탄이 쏟아지는데도 응사를 하며, 포복으로 실탄을 운반했다. 그러나 적진을 뚫고 오는 과정에서 아군의 희생도 있었다. 1명 사망, 2명 중상이었다.

 이후 치열한 사격전이 전개됐다. 실탄이 보급되자 대원들은 물러섬이 없이 적과 교전을 감행하여 3시간 만에 적의 포위망을 뚫고 격퇴시켰다. 모두들 불사신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해서 이중, 삼중으로 포위했던 빨치산의 대부대를 물리쳤다. 마침내 빨치산들을 물리치고 칠보발전소를 사수했다. 75명이 2,500명을 이긴 것이다. 보기 드문 승리였다. 그 선두에는 항상 차일혁이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살갗이 따끔따끔하여 옷을 벗어보니 몸 곳곳에 총알이 스치고 간 자국이 뻘겋게 멍들어 있었다. 단 1~2센티만 위치가 달랐어도 총알이 명중되었을 것이다.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에서 차일혁 부대는 적 사살 68명을 비롯하여 M1소총 3정, 소련식 장총 2정, 수류탄 5발, 실탄 600발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발전소를 확보한 후 발전시설을 살펴보니 빨치산들이 취수로를 짚단으로 차단하고, 모터와 터빈을 파괴해 놓았다. 차일혁은 중앙청 전기국에서 온 기사 1명과 전업회사 기술자들과 함께 복구공사에 들어갔다. 엄동설한인 데다 산간벽지인지라 인부(人夫)구하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차일혁은 대원들과 함께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갔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물속에 들어가 취수로에 박혀있는 짚단을 빼내다가 잠시 나와 불을 쬐곤 다시 들어가 취수로에 박혀있는 짚단을 빼내는 일을 반복했다.

 살이 얼어 터지고,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취수구를 복구했다. 그런 노력 끝에 칠보발전소에서 만든 전기가 남한 전역으로 송전됐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강원도 영월발전소가 적에게 점거된 직후라, 마산의 미군 발전함과 함께 남한일대의 송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마산의 미군 발전함에서 2만kw, 칠보발전소에서 1만 3천kw를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칠보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는 주로 충남과 전라남북도 지역으로 송전됐다.

 칠보발전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자 차일혁 부대는 발전소의 안전한 확보를 위해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독고봉을 중심으로 미수복지역인 정읍군의 산내면과 산외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이때 차일혁은 대대장용 지프차량과 수송차량 그리고 보충 병력을 지원받았다. 독고봉에는 정읍군당의 기포병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몇 차례 공격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던 독고봉도 차일혁 부대의 용맹스런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차일혁 부대는 1951년 2월 17일, 마침내 독고봉에 ‘인공기(人共旗)’ 대신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불렀다. 독고봉을 점령한 후 차일혁 부대는 계속해서 미수복지인 정읍의 산내면과 산외면으로 진격하여 전북도당 직속의 카추샤병단과 번개병단을 격멸하고 치안을 회복했다.

 차일혁 부대는 그때까지 적 사살 72명, 생포 23명을 비롯하여 소련식 기관포 1문, 소련식 장총 2정, 기타 총기 10정, 일본도 3개, 사이드카 1대, 박격포탄 7발, 사제수류탄 2발을 획득했다. 그에 반해 아군 피해는 전사 3명, 부상 6명이었다.

 차일혁 부대의 그동안 전공에 대해 1951년 2월 18일 오전 10시, 표창 및 감사장 수여식이 산외면 초등학교에서 전북 도경국장 임석하에 수천 군민(郡民)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의택 도경국장은 “이제야 행정이 복구된데 대해 그간 지방민에게 끼친 고충을 생각할 때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치안 확보에 이어서 비단 군경에만 의뢰할 것이 아니고, 오직 여러분의 애국심에 입각하는 적극적인 원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칠보발전소 탈환과 미수복지역을 회복시킨 공로로 표창장과 감사장을 받은 차일혁은 “나는 조국이 존망에 처한 대한민국의 아들로서, 또 대한민국 경찰관의 일원으로서, 다만 직책을 완수하려고 애쓸 따름인데, 표창장과 감사장을 받으니 미안스럽습니다. 국가의 위기에 처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아직도 마음껏 일하지 못한 것을 대단히 미안스럽게 생각하며, 동포에게 사과드립니다. 더구나 부하를 많이 희생시킨 책임자로서 유가족에게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라며 겸손을 담은 답사를 했다.

 이후에도 차일혁 부대는 빨치산들의 수탈(收奪)이 심했던 산내면의 치안회복과 주민들의 위무에 주력했다. 차일혁은 빨치산의 아지트를 습격하여 얻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작전상 또는 발전소 공사를 하면서 동원된 주민들에게 품삯을 지불했다. 주민들은 차일혁 부대가 품삯을 지불하자, 처음에는 희귀한 일로 여겼다. 차일혁은 빨치산 소탕 작전 중 노획한 농가의 소나 식량들을 주인을 찾아 줌으로써 민심을 얻었다.

 차일혁은 50여 일 간의 작전기간 동안 5천여 주민들을 빨치산들로부터 해방시켜줬고, 상금으로 받은 돈을 이재민(罹災民)들에게 나눠주는 선행도 서슴치 않았다. 차일혁은 토벌작전도 잘했지만, 주민들을 위하는 위민경찰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차일혁 부대는 그렇게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후 전주로 귀환했다. 그때가 1951년 3월 초순이었다. 50여 일간의 기나긴 작전이 끝났다. 그렇지만 차일혁 부대에게 휴식은 사치에 불과했다. 다음 작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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