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43] 칭기스칸 무덤은 어디 있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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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1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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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한 줄만 기록된 칭기스칸 죽음
칭기스칸의 사망과 관련해 몽골비사는 딱 한 줄만 기록하고 있다.

"탕구드(서하) 사람들에게 칭기스칸이 두 번째로 원정하여 무찌르고 돌아와 돼지해(1227년) 하늘로 올랐다"
 

[사진 = 부르칸 칼둔 인근 초원]

그 외에 그의 죽음과 관련해 아무 기록이 없는 것은 그의 유언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원사(元史) 태조(太祖:칭기스칸) 22년(1227년)조는 "칭기스칸을 기련곡(起輦谷)에 안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사 본기(本紀)는 칭기스칸의 뒤를 이은 태종(오고타이), 정종(뭉케), 세조(쿠빌라이)등 9명의 황제가 기련곡에 묻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련곡이 부르칸 칼둔으로 짐작이 갈 뿐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사진 = 칭기스칸 주관 연회]

중국으로서도 중국 땅에 들어선 역대 왕조의 무덤을 모두 확인했지만 유독 몽골이 세운 원조 황제의 무덤만은 확인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나 일한국에서 쓴 집사에도 칭기스칸의 죽음과 관련한 언급이 있지만 이 역시 “칭기스칸의 시신이 40일 거리정도로 옮겨졌는데 도중에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만 언급돼 있다.

▶ 칭기스칸 무덤 지킨 우랑칸 투멘
그러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르는 몽골의 다얀칸 시절에 투멘(Tumen)이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말로 하면 만호(萬戶) 또는 만인대(萬人隊)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천호제의 연장선상에서 만 명의 병력을 공출한 집단이다. 이 투멘이 여섯 지역에 배치 됐다. 그 가운데 우랑칸 투멘이 바로 칭기스칸의 묘와 이후의 칸들의 묘를 지켜온 우랑칸 천호의 후손들이었다.
 

[사진 = 몽골 산림지역]

이 우랑칸 투멘이 배치된 지역이 바로 헨티 산맥 산중으로 부르칸 칼둔이 포함된 지역이다. 따라서 칭기스칸과 이후 칸들을 안장한 무덤이 부르칸 칼둔 어디엔가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전해지는 얘기로는 칭기스칸이 부르칸 칼둔에서 사냥을 하면서 큰 나무 아래서 쉰 적이 있는 데 나중에 죽으면 이곳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 비사는 기병 만 명이 매장지를 말발굽으로 밟아 평평하게 만들어서 주위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의 묘지위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강줄기마저 다른 곳으로 가도록 우회시켰다는 또 다른 얘기도 있다. 또 장례식을 지켜본 2천여 명의 인부들과 8백 여 명의 병사들을 모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진 = 칭기스칸 유품]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어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를 다투는 학자들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다만 공통적인 것은 그의 무덤 속에는 처녀와 말과 함께 정복전쟁으로 획득한 금과 은을 비롯한 다른 보물 등의 전리품이 함께 묻혔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고고학 탐사 팀들이 이지역의 탐사를 노렸지만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 가장 먼저 무덤 찾기에 나선 일본
무엇보다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던 70년 동안 소련은 칭기스칸을 폄하하고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로 삼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의 탐사를 허용할 리 없었다. 1990년 몽골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가장 먼저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겠다고 나선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사진 = 헨티산맥]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후원한 일본 탐사 팀은 헬기를 타고 헨티 산맥의 산꼭대기에 오르는 등 요란을 떨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무덤을 찾는데 성과는 없었지만 일본은 무덤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몽골 전역을 위성 촬영하는 등 짭짤한 이익을 챙겼다.

태평양전쟁 때부터 몽골에 눈독을 들이고 한 차례 전쟁까지 치렀던 일본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한 몽골의 사정을 재빨리 파악해 경제적인 공략에 나서려고 서둘렀다. 따라서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는다는 핑계로 몽골전역을 위성 촬영해 지하자원의 매장을 비롯해 몽골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 20년 무덤 찿기에 공들인 크라비츠
그 이후 미국인과 독일인, 영국인, 러시아인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탐사활동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미국 시카코 출신의 변호사로 알려진 모리 크라비츠라는 인물은 칭기스칸에 매혹돼 지난 1992년부터 20년 이상 칭기스칸의 무덤을 찾는데 공을 들여왔다.
 

[사진 = 카라코룸 발굴작업]

특히 2002년에는 이 근처지역에서 한 군인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미국과 몽골의 합동 발굴단이 모리 크라비츠의 지휘아래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갑자기 심한 돌풍으로 돌이 굴러 떨어져 발굴요원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또 차량 운전사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숨지는가 하면 발굴단 내부에 의문의 전염병이 돌아 인명 피해가 나는 등 사고가 잇따르자 작업을 멈추고 말았다. 몽골의 언론들은 칭기스칸 무덤의 저주가 내렸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당시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이 무덤 탐사작업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 "무덤을 찾으면 재앙이 온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무덤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둬야한다고 믿고 있다. 그 무덤이 열리면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무덤을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안 찾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진 = 고분 발굴 미이라]

그래도 무덤을 찾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를 않고 있다. 지난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하 통신기술연구소팀은 초고해상도 위성사진 8만 5천 건을 선별하고 레이더 스캔자료를 3차원으로 재구성해서 숨겨진 건물구조나 특이한 형태를 확인한 뒤 탐사에 나섰다.

최첨단 기법을 동원해 신빙성이 높은 장소를 발견했다고 기대를 걸었지만 이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첨단기술과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모험이 동원된 것과 같은 탐사활동은 계속 이어지겠지만 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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