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후흑(厚黑)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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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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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酒食雜記

      [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후흑(厚黑)의 시대

낯이 두껍기로는 단연 유비(劉備)다. 처자를 적의 수중에 남겨두고 달아나고, 종친의 나라도 미안한 척하며 가로챈다. 서른 살 아래 손권(孫權)의 누이동생과 부끄러운 척 결혼하고,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는 척 귀를 감싼다. 단지 유(劉)씨라는 이유로 황제가 되겠다고 한다. 그야말로 면후(面厚)다.
속이 시커멓기로는 조조(曹操)다. 그의 사전에 ‘쪽팔림’이란 없다. 수염을 잘라 목숨을 구하고, 배신을 우려해 은인을 죽인다. 내가 죽어야 세상에 평화가 이뤄진다면, 차라리 난세를 택한다. 그가 말했다.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버릴 수 없다.” 한마디로 심흑(心黑)이다.
청나라 말에 태어난 리쭝우(李宗吾)는 열강의 먹이가 된 나라 꼴에 참담해했다. 쑨원(孫文)이 세운 ‘동맹회’에 가입해 반청(反淸)혁명에 앞장선다. 그가 볼 때 난세에는 공맹(孔孟)의 가르침이 덧없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나름대로 ‘역설 정치학’을 구상한다. 바로 후흑학(厚黑學)이다.
후흑(厚黑)은 면후(面厚)와 심흑(心黑)의 합성어다. 면후는 말 그대로 두꺼운 낯짝, 즉 뻔뻔함이다. 심흑은 검은 속, 즉 음흉함이다. 그 대척점은 면박(面薄)과 심백(心白)이다. 얼굴 가죽이 얇아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마음이 깨끗해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그의 관점에서 유비와 조조는 뻔뻔함과 음흉스러움이 남달라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 인의(仁義)보다 인의(人意), 사람의 의지가 중요하다. 인의야 도둑들도 있다. 장자(莊子)는 “도둑질하러 들어간 집에서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이 의(義), 턴 재물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인(仁)”이라고 이죽거렸다.
그렇다. 난세에 선(善)과 악(惡)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가. 셰익스피어도 맥베스 1막에서 “옳은 것은 그르고, 그른 것은 옳다"고 읊조린다. 맑음은 더럽고, 더러움은 맑다고도 한다. 노자(老子)도 세상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알고 보면 추하다고 하지 않았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역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란 대구(對句)로 완성된다.
리쭝우에 따르면 최고의 후흑(厚黑)은 월(越)나라 구천(句踐)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에서 곰의 쓸개를 맛보던 주인공이다. 그는 오(吳)나라를 공격해 합려(闔閭)를 죽였는데, 아들 부차(夫差)가 섶에 누워 복수의 칼을 간단다. 이를 안 구천이 ‘선빵’을 날리지만 도리어 사로잡히게 된다.
부차에게 미녀 서시(西施)를 바치고 뇌물을 써 구차하게 목숨을 구한다. 이후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다짐하고, 결국 부차를 죽인다. 오자서(伍子胥)가 맞았다. 처음 이겼을 때 복수의 싹을 잘라야 했다.
구천의 진면모를 알아챈 범려는 서시를 품고 세상 속으로 숨는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조진궁장(鳥盡弓藏)’이다. 미련이 남아 권력의 부스러기를 탐했던 문종은 죽음으로 몰린다. 후흑의 대가 구천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야 눈 하나 깜짝할 것도 없다.
후흑을 기준으로 항우와 유방의 쟁패를 분석한 ‘초한지 후흑학(신동준 지음)’도 있다. 사슴을 쫓던 영웅들을 넷으로 분류하는데, 먼저 ‘면박심백(面薄心白)’의 항우(項羽)다. 얼굴 빛을 꾸미지도 못하고 속을 숨기지도 못한다. 전형적인 귀족의 후예이다. 가진 자는 굳이 자신을 감출 필요도, 남의 눈치를 살필 이유도 없다.
다음은 ‘면후심백(面厚心白)’의 한신이다. 동네 양아치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정도로 낯가죽은 두껍다. 하지만 스스로 공(功)을 자신했고, 유방을 믿었다.
‘면박심흑(面薄心黑)’으로는 범증과 괴철이 있다. 천하를 좌우할 계책을 갖고 있으나 낯이 두껍지는 못했다. 범증은 항우가 유방을 살려주자 탄식하며 떠난다. 괴철은 삼국지의 제갈량에 앞서 ‘천하 삼분지계’를 건의하지만 한신이 머뭇거리자 ‘토사구팽’을 경고하며 떠난다.
최후의 승자는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유방(劉邦)이다. 홍문연에서 항우에게 무릎도 꿇고, 싹싹 빌고, 잔도를 불사르며 달아났던 그이다. 예의도 염치도 의리도 인정도 없다. 그러나 해하에서 단 한번의 승리로 천하를 차지한다.
지금 동북아에 격랑이 일고 있다. 일촉즉발의 전운까지 감돈다. 갈등의 접점은 단순하다. 최소 희생으로 최대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후흑의 관점에서 미국의 트럼프,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북한의 김정은에 공통점이 있다. 모두 낯이 두껍고 속이 시커멓다. 바로 면후심흑(面厚心黑)이다.
이를 상대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가. 얼핏 면박심백(面薄心白)으로 비친다. 염치를 알고, 의리를 지키며, 사심 없이 성실한 것이다. 정말 그럴까. 어쩌면 “철면피도 아니고 흑심도 없다(不厚不黑)”고 상대를 방심하게 하는 후흑의 최고봉 아닐까. 낯가죽은 성벽보다 두껍지만 형체가 없고, 속마음은 숯보다 시커멓지만 색채가 없는 ‘불후불흑 무형무색’의 경지 말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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