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④] 중국 무협영화 전설이 된 ‘불타는 홍련사’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입력 2017-09-07 14: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3년간 같은 이름의 영화 18편 쏟아져

중국 영화 '불타는 홍련사'(1928)의 포스터.[사진 출처=바이두]

무협(武俠)은 한국 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중국영화 장르다. 아직도 중국영화하면 1970년대 스크린을 주름잡았던 ‘협녀’나 ‘외팔이’ 시리즈를 떠올리는 관객이 적지 않다. 강호에 의리가 땅에 떨어지면, 원수를 갚으러 나서는 무사들을 그린 무협은 특유의 남성성을 바탕으로 한국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무협의 역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장이머우(張藝謀)나 첸카이거(陳凱歌), 왕자웨이(王家衛) 등 내로라하는 중국 감독들치고 무협을 찍어보지 않은 경우가 드문 까닭은 어쩌면 무협이 중국영화의 ‘고향’과도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무협영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최초의 무협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1928년 만들어진 ‘불타는 홍련사(火燒紅蓮寺)’가 중국 무협영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사실 중국영화는 무협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영화가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정군산’이었으니, 이미 그 안에 무협 요소가 들어있었다. 정군산 이후에도 적지 않은 영화들이 무협을 소재로 삼았다.

불타는 홍련사는 홍련사라는 절을 차지한 거짓 승려들의 사악한 행위에 맞서 싸우는 네 협사의 이야기다.

중국 후난(湖南) 지역에 사는 농민이 마을 변방에 있는 나루터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지만 패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아들 샤오칭(小靑)을 무림 고수에게 보내 무술을 익히게 한다.

공부를 마친 샤오칭은 고향에 돌아오지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다시 집을 떠난 샤오칭은 우연히 홍련사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런데 홍련사에는 수많은 악귀들이 살고 있었다. 승려라는 사람은 악귀의 우두머리였다. 승려의 겁박에 못 이겨 도주하려던 샤오칭은 자신을 도와주는 세 협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고, 이들과 협력해 홍련사에 불을 질러 응징한다.

‘무’란 싸움의 기술을 말하고, ‘협’은 의리를 지키는 정신을 뜻한다. 따라서 협사들은 어떤 규범이나 법규도 안중에 없었다. 유일한 행동 원칙은 의리에 부합하는지 여부다. 협사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숱한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기에 비범한 무술을 필요로 했다. 더욱이 전쟁이 끊일 날 없었던 중원에서 무와 협은 오랜 전통이 돼 내려왔다.

‘삼국지연의’나 ‘수호지’ 등의 소설이 자리 잡으면서 이런 풍조는 더 깊이 뿌리내렸다.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은 중국 소설사를 정리한 책인 ‘중국소설사략’에서 청나라 소설을 몇 종류로 나누면서 그 중 하나로 협의(俠義)소설을 꼽았다.

중국영화가 무협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소설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들은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불타는 홍련사도 당시 유행하던 무협소설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영화는 상영 직후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상하이(上海) 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제작사인 명성영화사는 뜻밖의 호응에 놀라 연달아 후속편을 만들었다. 1931년까지 불타는 홍련사라는 이름으로 모두 18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중국영화사는 물론 세계영화사에서도 흔치 않은 기록이다.

당시 상하이 영화계는 ‘불타는’ 시리즈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불타는 청룡사’, ‘불타는 구룡산’, ‘불타는 칠성루’ 등의 영화가 우후죽순처럼 제작됐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3년 동안 제작사 50여곳이 모두 250편이 넘는 무협영화를 찍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대중의 환호에 더 놀란 쪽은 국민당 정부였다. 예상치 못했던 대중의 운집이 정치적 사건으로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국민당 정부는 1931년 무협영화 제작 금지령을 내린다. 이른바 ‘괴력난신(怪力亂神)’, 즉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대중을 선동한다는 이유였다. 국민당 정부의 금지 조치로 인해 상하이 영화계를 ‘불살랐던’ 무협영화 신드롬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1928년 이후 무협영화가 유행한 까닭은 당시 중국 내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을 소탕하기 위한 북벌전쟁(1926년)을 시작한다.

그러나 국민당의 분열로 인해 위기를 느낀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공산당원을 숙청하는 4·12 정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국공합작 결렬은 물론 북벌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암울한 정치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관객들은 무협소설과 영화 속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성취를 맛보고자 했던 대리만족의 심리였다.

‘불타는 홍련사’는 이후 중국 무협영화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홍콩과 대만에서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작품도 적지 않다. 1950년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확인된 것만 세봐도 모두 7편이 넘는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94년 쉬커(徐克)가 제작하고 린링둥(林嶺東)이 감독을 맡았던 ‘화소홍련사’다. 쉬커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이 중국 액션영화의 적자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중국 영화 '불타는 홍련사'의 스틸 사진.[사진 출처=바이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아주NM&C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