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주식잡기 酒食雜記] “닥치고 쏘라”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08-30 20: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 = 박종권 칼럼니스트]

 

“닥치고 쏘라”

악당은 말이 많다. 그냥 쏘면 될 것을 주절거리며 시간을 끈다. 아마도 순간을 즐기는 것일까. 어김없이 주인공에게 반격의 기회가 온다. 주인공은 방아쇠를 당기고, 악당은 쓰러진다.
차이는 하나다. 악당은 쏘기 전에 말하고, 주인공은 쏘고 나서 말한다. “더럽게 말이 많군!” 영화 007시리즈 이야기이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죽지도 않고, 때로는 두 번 살면서 속편이 이어지는 배경이다. 그래서일까. “닥치고 쏘라(Don’t talk, just shoot!)”는 금언이 생겼다.
영화에선 쏘지 않고 주절거리는 쪽이 권선징악의 희생자이지만, 역사에선 죽이지 않고 미적거리는 쪽이 결국 승자독식 구조에서 패자가 된다. 잠깐 우쭐거림이, 일순 방심과 연민이 선악과 승패를 가르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또다른 주인공 손빈은 동문수학한 방연보다 재주가 뛰어났다. 일산불이호(一山不二虎), 산에 호랑이가 둘일 수 없다. 경쟁자는 싹을 잘라야 한다. 방연은 손빈을 위나라로 불러놓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두 다리를 자르고 얼굴에 먹으로 글자를 새겼다. 손빈(孫臏)의 빈은 죄인의 발을 자르는 형벌을 뜻한다.
그러면 창피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제나라로 달아난 손빈은 군사전략가로 등용돼 머지않아 복수의 기회를 잡는다. 위나라와 전투가 벌어지자 매일 군대의 아궁이를 조금씩 줄이는 속임수를 쓴다. 마치 탈영병이 속출하는 것처럼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다. “전쟁은 속이는 게임이다(兵者詭道也).” 손자병법의 핵심이 아니던가.
방연은 “겁쟁이들이 그러면 그렇지”하며 급히 추격한다. 어스름 저녁, 계곡의 입구에 도착하니 껍질이 벗겨진 나무에 뭔가 글씨가 써있다. 횃불을 들어 보는 순간 화살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곳에는 “방연은 이 나무 아래 죽는다”고 씌어 있었다. 횃불이 표적이 된 것이다.
방심 혹은 자만심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여하튼 방연은 손빈을 그냥 쏘지(Just Shoot) 않은 대가를 자신의 목숨으로 치렀다.
범저도 변론에 뛰어났다. 재능에는 늘 시기가 뒤따르는 법이다. 수고라는 자가 위나라의 공자인 위제에게 참소한다. 간신의 혓바닥 놀림에 귀가 녹은 위제는 범저를 매질하고 대나무 발에 둘둘 말아 변소에 버린다. 하객들이 그 위로 오줌을 눈다. 시범케이스로 일부러 모욕한 것이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빠진 범저는 자신을 지키는 위병에게 “구해주면 사례하겠다”고 꾄다. 위병이 “시체를 버리겠다”며 범저를 빼낸다. 위제가 뒤늦게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추적하지만, 이미 늦었다. 누항에 숨었다가 진나라로 달아난다.
진나라의 재상이 된 범저는 나중에 “위제의 목을 가져오지 않으면 위나라를 치겠다”고 위협한다. 위제는 조나라 평원군 집에 숨어있다가, 우경에게 의지하고, 신릉군에게 SOS를 친다. 신릉군이 주저하는 사이 위제는 자결하고 만다. 조나라는 그의 목을 진나라에 바친다.
사나이에게 모욕을 줄 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매질하고 변소에 버린 그 순간, 위제는 시한부 인생이 된 셈이다. 그 역시 쏘지 않은 탓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중국 고사에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끝까지 살아남아 반전의 기회를 잡은 스토리는 차고 넘친다.
종횡가인 장의도 처음엔 불우했다. 소진과 함께 귀곡자 문하생으로 유세술을 배운 뒤 초나라로 간다. 초의 재상과 더불어 술을 마셨는데, 귀중한 구슬이 사라졌다. 재상은 장의를 의심해 수백 번 매질하고는 풀어준다. 피투성이 장의가 아내에게 묻는다. “내 혀가 아직 붙어 있소?”
그가 나중에 진나라의 재상이 됐을 때 초의 재상에게 격문을 보낸다. “나는 당신의 구슬을 훔치지 않았지만, 매질을 당했다. 이제 당신 나라를 잘 지키시라. 당신의 성읍을 훔칠 터이니.”
당시는 합종과 연횡이 서로 맞서 있을 때였다. 소진은 강한 진나라에 나머지 제후들이 뭉쳐 맞서야 한다고 설파한다. 합종책이다. 장의는 진나라와 동맹을 주장하며 반대하는 나라는 하나씩 격파하는 계책을 낸다. 연횡책이다.
처음엔 합종책으로 무게추가 기운다. 사실 장의는 먼저 출세한 소진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가 매정하게 거절당한다. 화가 난 그는 진나라에서 유세해 소진의 조나라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진이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이 필요한 모든 비용을 댔다. 뒤늦게 이를 안 장의는 “소진이 있는 동안 내가 무엇을 하겠나”며 탄식한다.
종횡의 결말은 장의의 승리다. 이유는 단순하다. 소진이 먼저 죽은 것이다. 사마천은 말한다. “세상이 소진을 더 미워하는 까닭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산 장의가 죽은 소진의 단점을 부풀리고, 자신의 주장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살아남은 자가, 오래 사는 자가 이긴다. 역사는 산 자, 곧 승자의 기록이다. 서부의 승자도 먼저 쏘거나 뒤에서 쏜 카우보이다. 정치의 본질도 믿지 못할 자와 웃으며 손잡는 것이다. 뒤를 조심하면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