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리포트] 강력한 지도자 시진핑의 뿌리, 중국의 위대한 혁명 전사 시중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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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정 기자
입력 2017-09-0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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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13살에 혁명에 뛰어든 영웅

  • 청렴하고 소박한 가풍,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 등 시 주석에 이어져

(왼쪽) 젊은 시절의 시중쉰, 청년 시진핑과 부친인 시중쉰의 다정한 모습.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등장한지 5년이 지나간다. 시 주석은 강력한 반부패 드라이브로 ‘호랑이도 파리도’ 모두 잡으며 당 기강을 세우고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확보했다. 군권도 장악했다. 지난 7월 31일 인민군 창설 90주년 기념을 위해 네이멍구 주르허(朱日和) 훈련기지에서 열린 열병식은 시 주석의 위치를 잘 보여줬다.

이날 열병식에 참여한 인민군은 과거의 “서우장 하오(首將好 대장님 안녕하십니까)”가 아닌 “주시 하오(主席好 주석님 안녕하십니까)”를 외쳤다. 전임자인 후진타오 전 주석이 10년 임기 내내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시 주석이 공산당 내 권력을 빠르게 키우고 군권까지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친이자 중국 공산당의 위대한 전사, 공산당 혁명 1세대 원로로 꼽히는 시중쉰 전 부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본 시 주석이 군 내부 상황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물론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시 주석이 집권 이후 당 차원에서의 그의 업적과 사상에 대한 재조명도 잇따르고 있다.

시 주석의 많은 정책과 전략, 사상은 물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라는 ‘중국의 꿈(中國夢)’의 시작점에도 부친, 시중쉰이 있다. 강력한 중국의 지도자를 키워낸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 위대한 아버지 시중쉰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올 가을 19차 당대회와 시진핑 정권의 새로운 5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시진핑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뿌리인 시중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마오쩌둥이 주목한 시중쉰, “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농민봉기와 국공내전 등에서 활약했던 소년 시중쉰. 


# “시중쉰은 어떤 글귀가 좋겠는가”, 아무도 대답이 없자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堂的利益在第一位)’라고 적었다.

중국 공산당 당교 기관지인 학습시보(學習時報)는 과거 마오 전 주석이 시중쉰에게 이 8자의 휘호를 선사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당을 위해 헌신했던 시중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때는 74년 전 1943년 초의 일이다. 마오쩌둥 전 주석은 산시(陝西) 옌안(延安)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서북국고급간부회의를 개최했다. 쉬는 시간, 마오 전 주석은 갑자기 붓을 들고 서북국 간부들에게 어울리는 격려의 글귀를 적었다. 마오 전 주석 옆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런비스(任弼時) 등이 이를 지켜봤다. 

마오는 '창조정신이 있다(有創造精神)'라는 5자를 적어 왕전(王震)에게 먼저 건넸다. 리페이푸(李培福)에게는 '대중을 향해(面向群衆)’ 라는 4자를 적어줬다. 마오 전 주석은 갑자기 붓질을 멈추고 물었다. “시중쉰에게는 뭐라고 써주면 좋겠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마오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이윽고 미소를 띤 얼굴로 '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라는 8자를 남겼다. 

1934~1935년 중국 공산당은 2년여의 대장정에 나선다. 허베이·허난·안후이 등 동남부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던 공산당은 국민당에 밀려 2만5000리를 이동하는 퇴각에 나선 것이다. 11개의 성과 24개의 강, 1000개 이상의 산을 넘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고 1935년 10월 20일, 공산당이 도착한 곳이 바로 옌안지역이다. 중국 공산당 홍군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기도 하다.

서북국은 서북지역해방군과 국민당 통치 업무 총괄을 위해 1941년 5월 13일 중국 공산당이 중앙서북공작위원회와 산시•간쑤(甘肅)•닝샤(寧夏)후이족자치구 중앙국을 합병해 만든 기지다. 시중쉰은 서북국에서 활약한 혁명 영웅 중 하나다. 

마오 전 주석의 '휘호'가 서북국 영웅에게 건네지자 해방일보는 1면에 22명의 서북국 영웅에 대한 기사를 전면 게재했다. 헤드라인은 ‘마오 주석의 격려를 받은 22명의 서북국 생산영웅’이었다. 이 외에 각 영웅의 성과를 소개하고 ‘경제건설 이끈 동지를 배우자’는 제하의 사평도 실렸다.

사평은 시중쉰, 왕전 등이 정책 집행에 있어 사사로움이 없고 소박한 삶을 살며 자만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시중쉰에 대해서는 “인민의 안정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삶을 실현한 인물로 인민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묘사했다. 

이러한 시중쉰의 모습은 74년 후 오늘날 시진핑 주석으로 이어진다. 시 주석은 올해 '18차 6중전회 정신 관철·학습을 위한 토론회’에서 ‘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라는 말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나아간 관점에서 설명했다.

시 주석은 “우리 공산당은 국가·민족·인민의 이익 외에 자신만의 특수한 이익을 가질 수 없다. 사리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당의 특성과 근본적 취지에 부합한다. 인민의 근본적인 이익에서 출발해 스스로를 살피고 감독해야만 부족함을 일부러 가리거나 문제를 회피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결점으로 결점을 극복하고 문제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당 기강 확립과 청렴한 공산당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 근면한 농민의 자식에서 혁명 영웅, 좌천에서 복귀까지
 

시중쉰과 시진핑(왼쪽), 시위안핑 부자. [시중쉰]


1950년 군중일보(群衆日報)와 인민일보는 시중쉰에 대해 “애국심이 넘치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의지와 순수한 열정이 컸던 인물로 이는 전란을 수습해 인민의 안정과 평안한 삶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런 시중쉰을 키워낸 것은 가풍에 있다고 분석했다. 

시중쉰은 산시성 푸핑(富平)현의 평범한 농촌가정에서 태어났다. 1926년 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13살의 시중쉰은 선진사상을 접하고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한다. 15살이 된 1928년에는 학생운동에 참가해 활동하다 국민당 당국에 잡혀 감금되기도 했다. 살아남았고 투쟁을 지속하면서 중국 공산당원의 자격도 얻었다.  

시중쉰은 화목하고 근면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여동생인 시둥잉(習冬英)은 지난 1996년 펑파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집안에 아이들이 많았고 아버지는 자상했지만 엄격했다"며 "언제나 노인을 존중하고 어린아이를 사랑하며 싸우지도 욕하지도 말라고 가르치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평생 농민으로 살았지만 경험이 풍부하고 책을 좋아해 지식이 풍부했고 언제나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다고 덧붙였다. 일생을 농사에 바친 아버지의 우직함, 친근함, 근면함과 인내, 책임감 등이 시중쉰에 큰 영향을 줬고 어린 나이에도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힘이 됐다. 

시중쉰은 류즈단(劉志丹) 등을 따라 농민 폭동을 주동하며 혁명을 이끌었고 21살의 어린 나이에 산간변구(陝甘邊區·산시성과 간쑤성 경계지역) 소비에트 주석을 맡고 중국 공산당 서북국에서 류즈단, 가오강(高崗) 다음의 서열 3위에 올랐다. 

시중쉰이 마오 전 주석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목숨을 건진 일화도 있다. 홍군의 대장정의 끝인 서북국에 마오 전 주석이 근접했을 무렵, 상대적으로 융통성이 있었던 류즈단은 물론 시중쉰 등은 먼저 도착한 극좌파 세력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분류되면서 생매장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마오가 도착했고 마오 전 주석은 곳곳에 붙어있는 산간변구 소비에트 포고령과 시중쉰이라는 이름에 흥미를 갖고 "시중쉰이 누구인가, 데려와라"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

이후 국공내전 기간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중앙 서북국 서기, 서북국 야전군 부정치위원 등을 맡았고 펑더화이(彭德懷)와 허룽(賀龍)을 도와 국민당 군대에 대승했다. 류즈단이 전쟁 중에 사망했고 가오강은 둥베이로 이동하면서 시중쉰은 자연스럽게 서북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한 뒤에는 중앙 서북국 2서기, 서북국 군정위원회 주석대리, 제1야전군과 서북 군구의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1950년대 초반 마오 전 주석이 중앙권력 공고화 차원에서 5명 중국 서기를 수도 베이징으로 부르면서 서남국 제1서기 덩샤오핑(鄧少平)이 정무원(현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고 시중쉰은 중앙선전부장과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에 임명됐다.

시중쉰의 승승장구는 시진핑에게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선사했다. 경비원, 요리사, 가정부가 있는 넓은 사합원(중국 전통가옥)에서 살았고 6살이 되던 해 ‘대약진’으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했지만 밥을 굶을 걱정은 없었다. 여름이면 베이다이허(北戴河) 바닷가에서 피서를 즐기고 다양한 공연과 음악을 보며 문화적 소양도 길렀다.

모든 것이 풍족했지만 시중쉰은 근검 절약했고 소탈했고 또 허례허식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무명옷에 헝겊신을 신고 다녔다. 부인인 치신(齊心) 물론 자녀들도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시중쉰의 모습은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고 시 주석은 중국 공산당의 사치와 허례허식 근절을 천명하며 '8항규정'을 내놨다. 

시중쉰 인생의 길이 계속 평탄하지는 않았다. 1962년 ‘류즈단 사건’에 휘말리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류즈단의 생애를 담은 장편소설이 문제였다. 이 책이 류즈단을 이용해 가오강(반동분자로 낙마)을 선전한다는 밀고가 있었고 이는 마오 전 주석의 심기를 건드렸다. 류즈단의 전우인 시중쉰은 저자의 요청으로 소설을 검토한 바 있었고 결국 반동분자로 찍혀 낙마했다. 

그리고 16년이라는 감금·조사·감호의 긴 시간이 이어진다. 시진핑의 삶도 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가 변했고 문화대학명 기간에도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홍위병도 될 수 없었다. 

1976년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극좌파 4인방(장칭·야오원위안·왕훙원·장춘차오)이 물러나고 시중쉰 일가에도 다시 봄이 왔다. 1978년 2월 65살이 된 시중쉰은 베이징으로 돌아와 특별초청위원의 자격으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하며 정계 복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듬해에는 광둥성 성장에 임명됐고 1980년 광저우군구 제1정치위원이 됐다. 시중쉰은 당시 중국 최고실력자 덩사오핑(鄧小平)에게 광둥의 몇몇 지역을 묶어 시범적으로 외자 유치가 가능한 경제특구를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광둥성은 개혁개방 1번지 선전시를 중심으로 중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앞장서 이끌었다.

시중쉰은 1981년 중국 공산당 제11차 6중전회에서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되며 원래의 입지를 완전히 되찾았다.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공산당 총서기를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1993년에 공직을 떠났고 2002년 5월 24일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중국은 시중쉰을 위대한 공산주의의 전사이자 걸출한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혁명가, 중국 공산당과 군의 탁월한 리더로 평가한다. 시중쉰의 76년간 혁명의 생애는 굳건한 신념과 강력한 리더십, 굴곡진 역사와 치열한 세력 다툼, 변화와 발전의 여정이었다.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은 시진핑에게 정치적 기반과 인맥을 제공했다. 근검절약하는 청렴한 생활 태도로 비리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고 군권의 중요성, 조화를 중시하는 세련된 정치감각도 익혔다. 시중쉰이 있었기에 오늘날 시진핑이 있고 강력한 정권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중국언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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