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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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08-2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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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북한 남침 후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추대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6·25전쟁은 차일혁(車一赫)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차일혁은 광복 이후 귀국하여 그때까지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던 일본 악질형사를 처단하고, 전북 전주로 내려가서 은인자중의 (隱忍自重)생활하다가 청년활동과 건군활동에 투신했다.

 그렇게 해서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장군이 세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들어가 전라북도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비군인 호국군(護國軍) 103연대 1대대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다 얼마 후 호국군이 해체되고, 대신 청년방위대(靑年防衛隊)가 창설되자 방위소령(防衛少領)으로 임관하여 15청년방위대 총무처장을 거쳐 정보처장으로 활동하던 중 북한의 남침을 맞게 됐다. 한민족 최대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라고 일컫던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차일혁은 전북지역의 방어책임을 맡고 내려온 전북편성관구사령관 겸 서해안지구전투사령관 신태영(申泰英) 육군소장의 명령에 따라 육군 대위로 임관과 동시에 ‘국군7사단 직속 구국의용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얼마 후 북한군이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을 점령하자, 후퇴하지 않고 경각산(鯨角山)에서 ‘옹골연유격대’를 결성하여 게릴라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차일혁의 옹골연유격대는 북한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며 전과를 올렸으나, 그 과정에서 팔에 부상을 입게 됐고, 결국 그로 인해 군문(軍門)에서 나오게 됐다.

 차일혁의 옹골연유격대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으로부터 전북지역이 수복될 때까지 활동했다. 1950년 9월 28일 전북지역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2사단에 의해 수복되자, 차일혁은 전주시 치안대장을 맡아 지역 내 치안을 안정시켰다. 이어 차일혁은 정읍경찰서 수복작전과 고창경찰서 수복작전에 참가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돌파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北進)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차일혁은 옹골연유격대 활동 당시 팔에 입은 총상(銃傷)이 심해져 1950년 10월 30일, 결국 전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이 군을 나온 차일혁은 북한으로 넘어가 정치공작원으로서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고자 서울로 올라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의 국경도시 초산(楚山)과 중국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혜산진(惠山鎭)까지 진출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통한(痛恨)의 눈물을 머금은 채, 평양과 흥남을 내주고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차일혁의 통일에 대한 구상도 한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됐다.

 중공군의 기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앞세워 수도 서울을 향해 총공세(攻勢)를 펼쳤다. 이로 인해 차일혁도 더 이상 서울에 머물 형편이 못됐다. 어쩔 수 없이 전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차일혁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지리산 및 전북지역의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른바 낙동강전선에서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과 점령지역 내 지방 공산주의 잔당들이 연합한 빨치산들이었다. 빨치산들은 삐라살포와 차량습격, 파출소 등 관공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정부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후방지역 안정을 위해 부대를 투입하여 빨치산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빨치산토벌과 함께 후방지역 안정을 위해 갓 창설된 국군11사단, 즉 화랑사단(花郞師團)을 빨치산들이 준동하는 지역에 투입시켰다. 그렇게 해서 화랑사단으로 불리는 국군11사단이 빨치산들이 준동(蠢動)하고 있는 경상남도에 1개 연대, 전라남도에 1개 연대, 전라북도에 1개 연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에 나섰다. 그렇지만 화랑사단의 빨치산 토벌작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토벌지역의 지리에 밝지 못하고, 지역 내 사정에 정통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1개 연대가 험준한 산악지형을 품고 있는 1개 도(道)를 담당한다는 것, 그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였다. 특히 지리산과 바로 연결되는 전북지역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전북지역은 지리산과 바로 연결될 수 있는 덕유산을 비롯하여 회문산과 내장산 등이 있었다. 1개 연대의 병력만으로는 그곳을 전담하기에는 아무래도 벅찬 임무였다. 급기야 지역 내 지형을 잘 알고, 사정에도 밝은 전투경찰대의 창설이 절실했다.

 그렇게 해서 전북지역의 빨치산들을 토벌할 전담부대인 제18전투경찰대대가 드디어 창설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지휘할 유능한 지휘관을 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전북 도경에서는 신설된 전투경찰대대 대대장을 물색했다. 당시 전북지역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담당했던 책임부대는 11사단 13연대였다. 13연대장은 전북지역전투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는데, 연대장은 최석용(崔錫鏞) 대령이었다. 최석용 대령은 한때 중국에서 차일혁과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독립군 동지였다. 그런 관계로 최석용 대령은 차일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토벌작전에 전투경찰의 도움이 절실했던 최석용 대령의 머리 속에는 전투경찰대대 대대장으로 차일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이 기정사실화되자 전북지구전투사령관이던 최석용 대령과 차일혁의 인품과 무인(武人)으로서 자질을 잘 알고 있던 이우식(李愚軾) 법원장 등이 전투경찰 입문을 적극 권유했다. 차일혁은 처음에는 경찰에 들어가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차일혁으로서는 왼쪽 팔목의 부상으로 더 이상 군인의 길을 걸을 수 없게 됐다. 그때 차일혁은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것인지를!”

 마침내 차일혁은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조국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가급적 빨리 경찰에 투신해 빨치산을 토벌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전북도민은 물론이고 후방지역을 하루라도 빨리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차일혁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중국 항일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이자 동지였던 최석용 전북지구전투사령관과 지방유지(有志)들의 뜻을 받아들여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자 마음이 홀가분했다.

 전투경찰에 투신하기로 결심을 굳힌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전북도경(全北道警)으로 달려갔다. 그때가 1950년 12월 10일이다. 도경으로 달려간 차일혁은 전영진 인사계장의 안내로 김가전(金嘉全) 전북지사,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道警局長) 겸 경비사령관, 13연대장 겸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최석용 대령을 만났다. 김가전 지사는 내무부장관을 대신하여 차일혁에게 경감(警監)으로 임명한다는 임관사령장을 수여했고, 김의택 도경국장은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 보직명령서를 각각 수여했다. “임(任) 경감, 명(命) 제18대대장. 단기(檀紀) 4283년(1950년) 12월 10일…”

 차일혁은 청년방위대의 활동경력과 6·25전쟁 발발 후 유격대 활동 등이 인정되어 경감으로 특채됐다. 김가전 지사는 대대장에 임명된 차일혁에게 “차대장의 명성은 옛날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차대장의 실력을 믿겠소.”라며 덕담(德談) 겸 빨치산 토벌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 대장, 나는 차 대장을 부하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동지로 만나는 것이오. 최 대령 이하 전북유지들 그리고 경찰간부들이 한 결 같이 차 대장을 추천하기에 차 대장을 초빙했는데, 오늘 그 용자(勇姿)를 보니 참으로 마음 든든합니다.”라며 차일혁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를 넌지시 내비쳤다. 최석용 대령도 “차 대장은 나와 함께 중국 항일전선을 누빈 동지가 아니오?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이런 비상시국에 건투(健鬪)를 빕니다.”라며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 기뻐했다.

 일순(一瞬), 차일혁은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빨치산토벌대장이 되기까지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16세의 중국에서의 항일전선에 뛰어 든 이래, 광복된 조국의 해방공간에서는 일본의 악질경찰을 처단하고, 청년 및 건군활동을 하던 중 6·25를 맞이하여 7사단 직속 구국의용대와 옹골연유격대를 조직하여 북한군에 맞섰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적탄(敵彈)에 왼쪽 팔목이 관통됨으로써 팔을 못 쓰게 돼 결국 군에서 스스로 나오게 됐으나, 조국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을 누구 못지않게 뜨겁고 깊었다. 차일혁은 그런 열정과 애국심에 의지해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의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6·25동란(動亂)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조국의 운명이 최대 위난에 놓인 오늘, 전 민족이 총 결속하여 미증유(未曾有)의 대(大) 국난을 돌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유격전에서 입은 총상이 완치되기도 전에 싸울 수 있는 무장(武裝)을 하기 위하여 명예(名譽)도, 지위(地位)도, 계급(階級)도 없이 선배의 추천에 의해 전투경찰 대대장 경감의 보직을 받고, 미력(微力)한 힘이나마 조국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전주에서 차일혁.”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이 됨과 동시에 빨치산들을 전율케 하는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됐다. 1950년 12월 15일에는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전북도내 유지들이 다 모였다. 김가전 전북지사, 김의택 도경국장, 최석용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이우식 법원장, 그리고 전북지역 유지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자리에서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을 책임진 전투경찰대대 대대장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를 부하들에게 천명(闡明)했다. 이른바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숙적(宿敵) 위(魏)나라를 치기 위해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바친 것과 같은 ‘출사표(出師表)’였다. 다음은 차일혁의 출사표다.

“여러분들은 이제 늠름한 전투경찰대원으로서 조국을 지키는 데 혼신을 다해주기 바란다. 전투경찰은 더 이상 도피처도 아니며, 공비들에게 희롱(戱弄)당하는 약한 부대도 아니다. 우리는 절대, 공비들과 전투하는데 있어서 물러 설 수 없다. 여러분들이 후퇴한다면 내가 총을 쏠 것이고, 내가 후퇴를 하려 한다면 제군(諸君)들이 나에게 총을 쏴도 좋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이 땅에서 공비(共匪)들이 사라지는 날까지 용감히 싸우자!”

 차일혁은 출사표에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화랑정신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된다.”는 ‘동고동락(同苦同樂)’ 정신을 유난히 강조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그 옛날 신라통일의 원동력이 됐던 화랑도 정신을 마음에 늘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화랑들은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여기에 덧붙여 차일혁은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전우애란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동고동락의 정신을 들고 나왔다.

 내친 김에 부대훈(部隊訓)도 정했다.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긴 ‘생필사 사즉생(生必死 死必生)’으로 정했다. 차일혁이 가장 존경하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을 응용했다. 나아가 부대원들의 사생관도 정립시켰다. 차일혁은 “삶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삶의 연속이니, 절대 죽음을 두려워 말라. 생사는 필연이고,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훈시했다. 중국의 항일전선에서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숱한 전투를 통해 얻은 경험에서 얻은 일종의 체험지식(體驗知識)이었다. 부대의 상징도 정했다. ‘산중(山中)의 왕’인 ‘맹호(猛虎)’로 결정했다. 이른바 용맹스런 ‘맹호부대’였다. 이로써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이제 차일혁과 그의 용맹스런 맹호부대에게는 출정(出征)만이 남았다. 마침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에게 “빨치산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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