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배철현의 아침묵상] 13. 부정적 시각화否定的 視覺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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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입력 2017-08-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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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교수]

 
불행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나갈 때, 나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불가피한 장애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를 반드시 엄습하는 방해꾼을 '불행'(不幸)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인생을 심오하게 바라보고 최선의 삶을 지향하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에게 나쁜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깊이 묵상(默想)하고 준비하는 마음의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그는 묵상 수련을 통해 불행이 가져오는 피해를 최소화 하거나 무효화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집에 cctv를 설치해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와 물건을 훔쳐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걱정해 설치한 것이다. 혹은 내가 언젠가 치명적인 병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건강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행은 태생적으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갑자기 일어난다. 내가 건강보험을 들었다고 해서, 병이 걸리지 않거나 집에 cctv를 설치했다고 해서 도둑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불행한 사건들은 언젠가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불행한 일을 잘 대처하도록 인간을 수련시키는 훈련이 있다. 바로 ‘스토아철학’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불행한 일이 언제든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상상하고 준비하라고 촉구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고 준비한다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그 충격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망상한다. 정작 불행이 그를 덮치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다.
 
불행한 일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불행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인간본능과 관계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 대부분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 욕망은 바닥이 없어 마치 물이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와 같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을 가져다 줄 것만 같은 물건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을 쟁취한 후에, 너무 쉽게 그 욕망의 대상에 흥미를 잃는다.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항상 그 보다 더 새롭고 멋진, 심지어는 신기루와 같은 욕망으로 대치한다.
 
쾌락적응
심리학자들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쾌락적응'(快樂適應, hedonic adapta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쾌락적응을 경험한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다 줄 것만 같은 배우자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한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엔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한 배우자에게서 그(녀)의 단점만 발견한다. 우리는 배우자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그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며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곧 상대방을 얻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또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상상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쾌락적응의 폐해를 인식하고 그 해결점을 제시한다. 세네카, 에픽테투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고대 로마 철학자들은 쾌락적응을 치료하는 수련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예들 들어 세네카가 여행을 기획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여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들을 미리 꼼꼼히 생각하고,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세네카는 이 상상 수련을 통해 항상 혼란을 예상했고, 그 혼란을 자신의 계획의 중요한 일부로 삼았다.

인생엔 온전한 승리도, 온전한 패배도 없다. 항상 패배를 상상해 미리 준비하면, 그것조차 궁극적인 승리의 발판이 된다. 어떤 일이 그 자체가 승리이거나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승리를 만들기도 하고, 실패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 이룬 성과를 당연하게 여겨, 영원히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그런 생각을 착각(錯覺)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하기’를 수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노력해서 이룬 성과를 당연하게 여기기 쉽다. 그 성과엔 우리의 가족, 배우자, 자녀, 재산, 지위, 직업 등이 포함된다.
 

'세네카 흉상'. 17세기 바로크시대 무명 작가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소장.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부정적 시각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성취했지만 쉽게 실망하고, 더 큰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적응’이란 병을 고칠 방법은 없는가? 그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을 감사하고 원하는 태도’를 수련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말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들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수련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는 것들을 잃었다고 상상하라!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거나, 내가 실직했다고 상상해보자.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렇게 상상하는 훈련이 우리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더욱더 가치가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포스라는 스토아 철학자는 이 방법을 라틴어로 ‘프리메티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하기’ 혹은 ‘부정적 시각화’(negative visualization)로 정의했다.

세네카는 ‘부정적 시각화’를 이용해 3년 전 아들을 잃어 슬퍼하는 마르키아라는 여인을 위로한다. 세네카는 먼저 마르키아를 위로한 후, 그녀가 미래에 슬픔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포르투나’(Fortuna)라는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잠시 빌려준 것이다. 포르투나는 언제든지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갈수도 있고, 상상치도 못한 선물을 줄 수도 있다. 세네카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심지어는 우리가 그것들을 오랫동안 지키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에픽테투스는 부정적 시각화를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한다. "우리가 어린자식에게 입 맞출 때 그 아이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우리의 소유가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에 주어진 선물이다."
 
스토아 철학자인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명상록' 11장 34절에서 에픽텍투스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픽테투스가 한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당신 아이에게 입 맞출 때, 조용히 중얼거리십시오. 이 아이는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다.’ 친구들이 그에게 ‘부정이 타는 소리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에픽테투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보고 죽음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기 위해 두 가지를 상정해 보자. 한 아버지는 에틱테투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른 아버지는 그런 충고가 불길하다며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보다 오래살고 항상 그에게 기쁨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명의 아버지들 중 누가 자신의 딸을 보고 더욱더 사랑하겠는가? 첫 번째 아버지는 아침에 딸을 보고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삶의 일부 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가능한 대로 딸과 진정으로 소통하려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딸과의 만남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여 그 만남을 미룰 수도 있다.
 
그런 죽음은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세네카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이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라고 충고한다. 세네카는 심지어 “우리는 바로 이 순간을 우리 인생의 마지막처럼 살아야합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마음대로 쾌락을 즐겨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매 순간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산다는 의미에는 ‘부정적 시각화’라는 삶의 태도와 수련이 숨어있다.

우리가 하루를 사는 동안, 우리는 정기적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지 않을 것이며 이날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반추해야한다. 그와 같은 묵상은 우리를 쾌락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런 마음가짐은 하루를 값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이 나에게 허락한 마지막 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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