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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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08-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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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의 ‘진중기록(陣中記錄)’과 ‘토비(討匪) 300일-진중기(陣中記)’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알았고, 자신의 독특한 경험과 학문적 사색(思索)을 철학과 사상으로 연결시켰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자신의 전투행적을 기록으로 남길 줄 아는, 이른바 ‘칼을 찬 문인(文人)’이었다. 차일혁은 차돌처럼 단단한 무인(武人)이면서 새하얀 ‘백노지’ 위에 자신의 생각과 사유(思惟)를 ‘문장의 붓’으로 섬세하게 그려낼 줄 아는 문사(文士)였던 셈이다.

 차일혁의 둘도 없는 지음(知音)으로 평생의 지우(知友)임을 자처했던 전북일보의 김만석(金萬錫) 기자도 차일혁의 글재주, 즉 문재(文才)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인정하고 나섰다. 김만석은 자신의 비망록에서 “차(車) 대장은 글씨를 잘 쓰고, 문학적 소양이 많은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이후 부대가 출전할 때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나라와 일전을 벌이기 전에 출사표(出師表) 쓰고 나가듯이, 차일혁도 빨치산토벌을 나서면서 출사표를 작성하여 “전투경찰이 왜 빨치산을 토벌할 수밖에 없고, 그런 빨치산에 맞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인식시켰다. 차일혁은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토벌할 때도 무력(武力)에 의한 강압적인 토벌보다는 빨치산들의 자발적인 항복을 권유하는 ‘투항권고문(投降勸告文)’을 손수 작성하여 뿌렸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의 바쁜 진중(陣中) 생활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전쟁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수준 높은 글을 씀으로써 뭇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빨치산토벌과정에서 토벌대장으로서 느꼈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데올로기(Ideology)와 우리나라가 처한 동족상잔이라는 쓰라린 민족의 아픈 현실 문제를 차일혁은 아주 명쾌하면서도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은 확실히 탁월한 문재를 갖춘 문장가(文章家)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차일혁이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로 쓴 다음의 글은, 그가 재능과 실력을 갖춘 뛰어난 문장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軍警)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의 동족상잔이었다고.”

 차일혁은 뛰어난 글재주를 통해 자신이 수행하고 있던 작전을 ‘진중기록(陣中記錄)’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른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비견(比肩)되는 그런 전쟁기록이었다. 차일혁이 빨치산토벌대장으로 맹활약을 할 때 작전일지(作戰日誌)처럼 썼던 ‘진중기록’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북일보를 통해 소개됨으로써 전북도민은 물론이고 전국의 국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전북일보에서는 차일혁의 〈진중기록(陣中記錄)〉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토비(討匪) 300日(일) 陣中記(진중기”를 연재했다. 당시 전북일보는 차일혁의 빨치산토벌작전을 연재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밝히고 있다.

 “필자는 독자제현(讀者諸賢)이 너무나도 잘 아는 우리 전북경찰의 지보(至寶), 아니 그 보다도 공비토벌의 위훈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前) 제18경찰전투대대 대대장이며 현 철주(鐵舟) 부대장인 차일혁씨이다. 차일혁씨는 일찍이 학업을 필한 후 실국(失國)을 한(恨)한고, 중국으로 건너가 민족해방전선에 가담, 조국광복을 위하여 대륙에서 웅지를 펴다가 8·15가 되자 귀국, 해방 후 난마(亂麻)와 같이 극도로 혼란한 국내정세 하에서도 혼연히 사(邪)와 부정(不正)에 휩쓸림 없이, 확고부동한 태도와 강철 같은 의지로써 조국재건에 쇄골분신(碎骨分身)하여 대한민국 자주독립에 이바지함이 지대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호국군(護國軍)의 대대장으로서 우국청년들의 심신단련과 군사교육에 헌신하며, 이 고장 청년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흠모의 대상이 되었었다.”

 “6·25사변이 발발하자 결연히 일어서서 우국청년들을 규합 구국의용대를 조직하여,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해 있는 국토방위에 전 심력을 다하다가, 괴뢰군 침입 작전 동지들과 더불어, 도내 산야지대에 침입하여 유격전술로써 끝까지 적에게 도전하였던 것이다.

 9·25수복을 맞이하여 제18전투경찰대대 대장의 중임을 맡고, 당시 도내 각 산악벽지에 대거 웅거하고 있는 공비들의 경시할 수 없는 세력을 죽음을 각오한 불굴불요(不屈不撓)의 전투의지로써 무찌르고 무찔러, 남한일대에서 가장 빨치산의 위협이 컸던 본도(本道) 치안을 오늘과 같은 평안에 올려놓은 공로의 인(人)이다.“

 “지금 차일혁씨는 윤명운(尹明運) 전북도경국장의 지휘 하에 연일 공비토벌에 임하고 있었다. 이번 추석에도 부안 변산에 출전하고 있으리만큼 육신(肉身)과 심혈(心血)을 오로지 공비의 철저한 분쇄에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차일혁씨의 휘하에는 그를 흠앙(欽仰)하여, 도내 각지에서 모여든 젊고 씩씩한 용사들로서 차(車) 부대장의 명령이라면 아무리 험준하고 지난한 고지라도 넘어서고 무찔러 나가고 있다. 이제 그의 진중기(陣中記)를 읽어감에 있어서 우리는 그가 한낮 강한 의지만을 가진 무장(武將)이 아니요, 의리와 인정과 사랑과 눈물을 아울러 가진 정(情)의 인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마음대로 전기를 쓰고 있는 것도, 도내(道內)를 여행할 수 있는 것도 그와 그의 지휘부대의 은공(恩功)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하늘같이 높고 고운 몸뚱이를 조국과 겨레를 위하여 괴수(傀獸)의 총탄 앞에 깡그리 내 던지고, 불붙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선명하고 휘황한 진리다. 그들의 충성 앞에 그저 가슴이 떨리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뿐이다.”

 “지금도 가을 달빛 차게 흐르는 산기슭, 풀섶 위에서 원수를 노리고 엎드리고 있는 용사들의 창자가 비어 있음을 생각할 때, 기족과 더불어 이불 덥고 누운 우리는 무슨 말로서 대답할 것인가. ‘토비 300일 진중기’의 매 작전을 읽어가는 가운데, 후방의 국민으로서 각성이 새로워 질 것을 단언하는 바이다.”

 차일혁이 쓴 진중기록은 그의 오랜 친구였던 전북일보의 김만석 기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차길진(車吉辰)에게 전해졌다. 김만석은 이 진중기록을 차길진에게 주면서 “진중기록은 민족의 기록이다. 나는 더 이상 보관할 수도 없고, 또 보관할 이유가 없다. 이 기록들은 꼭 필요할 때 공개하기 바란다.”라는 첨언(添言)과 함께 차길진에게 건네줬다. 이로써 차일혁의 진중기록은 ‘민족의 기록’이자 ‘6·25전쟁의 소중한 전투기록’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자칫 역사의 뒤안길에서 영원히 묻힐 번한 차일혁의 ‘진중기록’이 오랜 세월을 거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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