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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열쇠와 쇳대 사이의 그 아득함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작가입력 : 2017-08-17 20:00수정 : 2017-08-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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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열쇠와 쇠때 사이의 그 아득함 

나는 남해안의 거금도에서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면적으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등에 이어 열 번째로 작지 않은 섬이다. 조선시대엔 흥양현의 절이도였는데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과 조·명 연합군이 왜선 50척을 격파했던 ‘절이도 해전’의 전승지다. 1970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섬의 인구는 2만5000명을 넘었다.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서른 개가 넘었고 초등학교가 열 개, 중학교가 두 개였다. 그런데 250여명 됐던 초등학교 친구들 중 중학교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절반이 채 안 됐다. 나머지 친구들의 행방을 그때는 잘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부모 따라 섬을 떠났거나 중학교 진학을 못 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섬은 비교적 전기가 빨리 들어왔다. 그건 순전히 그 섬 출신의 국민 스타 프로레슬러 박치기 왕 김일 선수 덕분이었다. 일제 식민의 기억이 뚜렷했을 어른들은 일본의 레슬링 선수 ‘도끼로 이마까’를 결정적일 때 한 방으로 보내버리는 김일 선수의 박치기에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보냈다. ‘찼다 찼다 차범근 김진국 센타링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 슛 골인’ 노래를 부르며 응원했던 아시안컵 축구보다도 김일의 레슬링 경기는 놓치면 원통할 축제였다. 모름지기 프로레슬링은 가난했던 시기 온 국민을 단합시키는 내셔널 스포츠였던 것이다. 그때의 우리들은 ‘가수 이미자가 죽으면 목을, 김일 선수가 죽으면 머리를 미국에서 사간다’는 말을 진짜로 알았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라며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됐던 그 즈음 마을에 어떤 바람이 불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옆집 영희 누이나 앞집 철수 형이 사라졌는데, 어김없이 ‘서울 갔다네’란 말이 돌았다. 그렇게 사라졌던 형, 누이들은 설과 추석이 되면 나타났다. 그런데 웬걸? 그을린 얼굴, ‘섬티’ 폴폴 났던 그들이 그새 ‘희고 고운 서울 사람 얼굴’에 입성도 삐까번쩍했던 것이었다. 그뿐인가? 섬에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희한한 장난감과 먹거리, 옷, 신발 같은 선물들도 한아름 지고 왔다. 그들은 말투도 예전과 달라졌는데, 어른들은 그걸 ‘서울말’이라 했다. 와중에 서울 간 지 얼마 안 된 말숙 누이는 “어머, 저기 영석이네 집 냉갈(연기) 좀 봐. 밥 짓나 봐. 우리도 밥 짓자. 저기 광 쇳대(열쇠) 어디 있니?” 같은 어설픈 서울말을 쓰기도 했다. 그 누이의 나이가 그때 아마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을 열다섯 살 이쪽저쪽 아니었을까? 물론, 연탄가스 중독으로 객지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자식이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새끼 때문에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엄마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몰려갔던 곳은 서울 남서쪽 외진 곳 허허벌판에 세워졌던 ‘구로공단’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 대처에서 완행열차 타고 밤새 달려 영등포역에 내리면 미리 서울에 와 있던 피붙이나 동네 선후배들이 그들을 맞이해 구로동으로 향했다. 연탄 아궁이만 붙은 작은 방들이 덕지덕지 엉킨, 아침이면 재래식 공동변소에 너도나도 줄지어 늘어서는 속칭 ‘벌집, 닭장’에서 그들의 고단한 서울생활은 시작됐다. 비키니 옷장과 밥상, 그릇 몇 개,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들 살림의 전부였다.

신나라 레코드 판 공장에 들어간 영식이 형은 완제품 검사 공정에 배치됨으로써 ‘판검사’가 됐다. 봉제공장에 들어간 순실이 누이는 프랑스 '비에르 가르뎅'의 원조였다는 전설의 ‘비오는 가리봉’ 표 청바지를 만들었다. 근방의 어느 벌집 ‘외딴방’에는 낮엔 동남전기주식회사, 밤엔 산업체 야간학교에 다니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던 ‘문학소녀 신경숙’이 있었다. 시골에서 멋모른 채 상경해 선택의 여지 없이 ‘공순이, 공돌이’가 됐다가 착취구조의 노동현실에 눈을 뜬 ‘청년 전태일’과 그 친구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넘게 세월이 흘렀다. 지금 거금도의 인구는 고작 5000명 남짓이다. 그중 많은 이들이 도시에 자식들을 보냈던 팔구십 어르신들이다. 그러하다. ‘구로의 장난감’에 환호했던 조무래기는 지금 중년의 가장이 돼 운명처럼 구로공단이 있던 바로 그 복판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구로는 그새 상전벽해가 됐다. 구로공단 자리는 디지털 단지 빌딩숲과 첨단 IT(정보통신)기업들로 바뀌었고, 벌집들은 고층의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나도 판검사’라 눙쳤던 영식이 형은 건설 현장으로 진출했다가 눈대중으로 배운 주택 장사로 100억대 부자의 반열에 섰다. ‘비오는 가리봉’의 순실 누나는 그대로 구로에 터를 잡아 가정을 이뤘고 큰 식당 주인이 됐다. 꾀돌이 현만 형은 가수가 됐다. 어떤 이는 지방의회 의원이 됐고, 또 어떤 이는 주경야독으로 대학교수가 됐다. 물론 모두가 그리 된 것은 아니고 어디서 뭘 하는지 연락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곧 해가 길어지면 ‘서울’을 그렇게 살아냈던 사람들이 구로동 순실이 누이 식당에서 모인다. 해마다 모이는 자리지만 레퍼토리는 언제나 어렸을 때 거금도와 막 상경했을 적 추억들이다. 술잔 기울이며 되새기는 옛날은 백만 번을 반복해도 즐겁기만 하다. 그게 ‘열쇠’와 ‘쇳대’ 사이의 그 아득함으로 그렇다는 걸 도시 출신들이 알 리 없다. 그들에게 한때의 서울은 ‘서럽게 우는 서울’이었다. 하여간 이번 모임 때는 옛날 이야기 하다 빈정 상해 꼬장부리는 형님이 없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