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아침묵상, 수련] 11. 식탐食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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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입력 2017-08-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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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교수]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
내가 나의 고유한 임무를 찾기 위한 수련생활을 시작하면서 세운 원칙이 있다. ‘이른 아침과 저녁은 온전히 내 자신에게 바칠 것이다.’ 이른 아침 태양은 여명의 기운으로 잠든 나를 깨운다. 어제의 나를 버리고 오늘의 나를 혁신하기 위해 아침 햇살이 찾아와 묻는다. “네가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나는 내가 할 일을 분명히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 아직도 어제까지 나의 잔상들이 뇌리에 남아 나를 과거로 끌어당기지만, 나는 버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지금’에 집중해 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오늘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상상한다. 한참 상상하면, 내가 해야 할 고유한 임무가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오늘 완수해야 하는 작업은 내 자신이 열망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이 시간과 장소에서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단계다. 목적지는 내가 내딛는 이 발걸음의 연장이다. 오늘 나의 행보가 바로 내가 그렇게도 열망하는 목적지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우리는 ‘도’(道)라고 부른다. 도는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며, 나의 발과 머리, 나의 행동과 생각이 일치된 삶의 태도다. 도는 생각이 실천이 될 때, 현재가 미래가 될 때, 길이 목적지가 될 때 나타난다.

내가 이 순간에 몰입해 오늘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않는다면, 나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길을 잃고 혼돈에 빠진다. 나는 어리석게 나에게 주어진 고유한 길을 찾는 방법을 타인에게 구걸하게 된다. 그것은 물고기를 나무 위에서 구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 같은 어리석은 처사다. 내 자신이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살기 위해 스스로 근신(謹身)하지 않으면 오늘은 영원히 상실된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숙련된 단계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린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일생이 걸린다.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Seneca, 기원전 4년~기원후 65년)는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삶을 위해 방해가 되는 것들, 재물, 직업 그리고 쾌락을 포기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을 때 자신들이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위대한 삶을 지향하는 자는 쓸데없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자신에게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훌륭하게 죽을 수도 있다.
 
이른 아침만큼 저녁도 중요하다. 아침과 저녁 중간에는 사회 생활로 자신도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온전히 주어진 저녁은 아침만큼 거룩하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의 임무를 완수하고 점검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저녁 약속을 잡는 경우가 있다. 저녁 약속은 식사와 함께 진행되기 마련이다. 식사는 나를 혼미하게 만든다. 음식은 나의 본성을 자극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육체를 무의식으로 반응하게 하는 가장 매력적인 유혹이다.

조금 전까지 나는 ‘저녁에 소식(小食)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잘 마무리하고 내일 아침에 가뿐하게 일어날 것이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결심도 음식 앞에서는 소용 없다.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은 나의 이런 기억과 결심을 한 순간에 삭제한다. 우선 눈으로 음식을 탐닉하고 후각으로 향기에 취한다. 그러면 입안에서 나도 모르게 침샘이 분출하기 시작하고 내 위장까지 반응하며 음식 받을 준비를 한다. 음식을 한입 넣고 씹으면, 음식, 침, 그리고 혀 사이사이에 숨겨진 미뢰가 자극돼 그 정보를 뇌에 전달하면 미각이 작동한다. 이 순간 음식은 내 영혼을 앗아가 버린다.
 
음식, 최고의 유혹
인간은 탐닉한다. 자신의 쾌락을 일깨우는 외부의 자극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한다. 탐닉은 우리를 중독으로 인도한다. 고대 성인들이나 사상가들은 항상 일상 중 식사를 경고해 왔다. 우리는 일상은 무해하다고 착각해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반복해 습관으로 만든다. 붓다나 예수와 같은 성인은 자신의 수련을 일상 습관에 대한 경계와 근절로 삼았다. 그들은 일상 습관의 핵심인 금식을 수련했다. 자기수련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탐닉을 걸러내고 자신을 주인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탐닉은 미묘해 확인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자신을 심오하게 응시하는 수련을 통해서만 그 정체를 가려낼 수 있다.
 
무슬림들은 매년 라마단 한 달간 금식(禁食)을 수련한다. 그들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세 가지 행위를 금지한다. 먹기, 마시기 그리고 성행위. 이 세 행위의 특징은 본능적이다. 금식을 아랍어로 ‘짜움’이라고 부른다. 짜움의 기본 의미는 ‘습관적으로 하던 행위로부터 스스로 하지 않기’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음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소중함을 상기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음식을 먹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먹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식사원칙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학교나 가정에서 가르쳐주기를 바란다면 오산이다. 자기, 일어나기, 대화하기, 관찰하기, 경청하기, 쓰기, 식사하기, 결혼하기, 은퇴하기, 죽기…. 이것들은 영어단어나 수학공식보다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삶의 지혜다. 서양에서는 이런 것들을 ‘에티켓’이라고 불렀다. 에티켓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몸가짐이다. 그러나 에티켓은 한 사람의 성격과 인격의 표현이다. 에티켓은 고대 그리스어 ‘에토스’에서 유래했다. 이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오랫동안 수련을 통해 지켜온 습관이나 관습을 의미한다. 에티켓은 그 사람의 평소 몸가짐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를 만든 교황으로 유명한 성 그레고리(540~604년)는 식탐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큰 죄들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들을 인용하며 식사원칙을 다음 네 가지로 기술했다.

첫째, ‘정해진 시간 이외에 배고프다고 먹지 않기’. 인간은 수 만년에 걸쳐 최적의 시간을 식사시간으로 구분했다. 그 시간을 준수하는 것이 지혜롭다. 둘째, ‘미각을 자극하는 진귀한 음식을 먹지 않기’. 인간의 감각은 무한하게 확장하기 때문에 그 무의미한 탐닉을 절제해야 한다. 셋째, ‘필요 이상의 음식을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기’. 탐식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배부르다는 사실을 망각해 건강에 해가 될 때까지 거의 게걸스럽게 먹는다. 넷째, ‘음식을 상상해 식사를 기다리지 않기’. 그는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바라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 된 식사에 예절을 지켜야 나에게 주어진 일과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일곱 가지 큰 죄명들과 네 가지 마지막 것들'


‘탐식’ 그림
‘탐식’에 대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년)다. 그는 1500년경 ‘일곱 가지 큰 죄명들과 네 가지 마지막 것들’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네 가지 마지막 것들’은 가운데 원형을 중심으로 네 구석에 있는 원형들로, ‘죄인의 죽음’, ‘심판’, ‘지옥’ 그리고 ‘영광’을 묘사했다. 가운데 원은 그리스도 눈의 동공을 상징한다. 그 동공 밑에 라틴어로 ‘카웨 카웨 데우스 위데트’(Cave Cave Deus Videt), 즉 ‘조심하라. 조심하라. 신이 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동공 주위로 펼쳐진 7개 패널은 일곱 가지 큰 죄를 상징하는 그림과 죄명이 적혔다. 패널 위 가운데 그림이 ‘탐식’이다. 그림 오른 쪽엔 술 취한 사람이 커다란 술 항아리를 통째로 들고 마신다. 그는 탐욕스럽게 술을 마셔, 술 대부분이 입 밖으로 흘러내린다. 그는 오른쪽 무릎이 다 해진 옷을 입고 있다. 자신을 관리하지 못한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그를 마시고 있다. 가운데 식탁에 앉아 있는 뚱뚱한 사람은 왼손에는 닭다리를 들고 오른쪽에는 술잔을 들고 ‘치맥’을 즐기고 있다.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나를 응시하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먹는데 몰입한다.

옆에서 닭다리를 달라고 손을 뻗은 그의 아들 역시 뚱뚱하다. 옷은 남루하고 신발은 허름하다. 패널 왼편엔 그의 부인이 있다. 정장을 한 그녀는 삶의 목표가 ‘먹는 행위’인 남편을 위해 삶은 닭 한 마리 전체를 접시에 담아 정성스럽게 가져온다. 이 패널 밑에 ‘굴라’(gula)라는 라틴어 단어가 보인다. 굴라는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굴루티레’(gluttire)에서 왔다. 음식을 음미하지 않고 급하게 목구멍으로 삼키는 행위다. '식탐'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글라터니'(gluttony)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필자가 존경하는 철학자가 나에게 조언했다. 수련은 “음식을 입안에서 칠십 번 씹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의 조언에 따라 천천히 음식을 음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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