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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5년 아주초대석] 권병현 前주중대사"암흑기에도 수교했는데…사드 갈등 담판 벌여 풀어라"

강정숙 기자입력 : 2017-08-13 18:22수정 : 2017-08-18 14:01
한중수교 '산파' 권병현 前 주중대사

권병현 미래숲 대표. [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1972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이 유엔에서 대만의 자리였던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차지한 바로 그 이듬해다.

같은 해 한국에선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이 뜻을 모아 발표한 성명이 중국과 정상관계로 가는 사실상의 발판을 만든다. 외교가에선 대만과의 외교관계가 점차 부담스러워진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권병현 전 주중 대사(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대표·79)는 당시 카운터파트인 장루이제(張瑞杰) 전 주한 중국대사와 비밀리에 중국 베이징에서의 수교 예비회담을 연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대만의 장제스는 물론 한국 측에서도 수교 협상 진행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 그리고 당시의 외교장관 3명을 포함한 극소수의 몇명 정도로 한·중수교 예비교섭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같은해 8월24일 한국과 중국은 새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한국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정상적 외교관계를 성립한다. 한·중수교다. 이들 한·중수교의 주역들은 25년이 지난 올해 5월 11일 백발의 노인이 되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중국 외교부가 마련한 자리였다.

한국에선 문재인 새 정부가 출범한 바로 다음날이었고,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한·중관계가 지난 25년래 가장 냉랭할 때였다.

한·중수교 25주년을 보름가량 남겨둔 지난 10일 권 전 주중대사를 서울 종로구 무악동의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사무실에서 만났다.

권 전 대사는 현재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간 갈등에 대해 "중국 측의 속내는 '초심으로 돌아가자'이다"라며 "암흑기에 수교도 했는데 양국 실무자들이 25년 전 수교 당시처럼 나서서 '사드 갈등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속내는 '초심으로 돌아가자'"

-요즘 한·중관계가 얼어붙어 중국 측과 만나도 그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 한다. 하물며 25년 전, 중국 측과의 협상은 상상이상으로 어려웠을 것 같은데.
"최근 한·중관계를 보면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긴 참 어려울 정도로 착잡하다. 수교 25주년을 나도 기다렸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긴 침묵과 한숨)…슬프다……"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남기신 글도 인상적이었다.
"이번 사드갈등 사태가 터진 뒤 나는 트위터를 통해 심경을 전했다. '이게 뭡니까, 참 슬픕니다' 였다. 이걸 중국 친구들에게만 보낸게 아니라 한국 정부에도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극복해야만 더 깊은 관계로 갈 수 있다. 훨씬 더 넓고 큰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다져지는 것이다. 어떻게 항상 순탄한 길만 가겠나."

-여전히 중국을 자주 방문하는 걸로 안다. 한·중관계의 심각성에 대해 직접 체감한게 있나.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다. 올해 5월 5~11일 한중녹색봉사단이 중국 네이멍구 쿠부치 사막에서 수목행사를 하고 베이징에서 청년포럼 및 교류를 했다. 한국 학생 100명, 중국의 대학생, 중국의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유엔, 아프리카 등에서 모인 400명가량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예년처럼 중국 베이징시와 공산당에서도 참석했다. 그리고 25년 전 한·중수교 당시의 한·중 원로들이 만났다. 중국 외교부의 주선이었다."

-사드 갈등으로 민간 교류도 막히는 상황에서 한·중수교 주역들을 그것도 중국 외교부의 주선으로 만났다니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날이 5월11일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바로 다음날이다. 중국 외교부가 주선해 중국 외교부 영빈관에서 1992년 수교 당시의 수교 핵심 원로들과 만찬을 했다. 서동신 당시 외교부 차관과 당시 과장이었던 신정승 전 대사, 나의 카운터파트인 중국 측 담판 대표인 장루이제(張瑞杰) 전 대사와 장팅옌(張庭延) 전 대사, 담정 대사, 중국 외교부에서는 한국처장 등이 나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중국 측이 먼저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하더라. 그 좋았던 시절로 다시 가자는 게 본심이다. 우리에게 답은 '초심'이다."

-양국이 초심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같은데 지금 대화가 어렵지 않나, 한·중수교 25주년 기념식도 따로 한다.
"중국 입장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면 미국 문제가 있을 거다. 미·중 관계에서 중국도 대국굴기(大国崛起·큰 나라로 일어서다)에서 오는 문제가 있다. 중국이 한국의 새로운 입장 정립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을거다. 2차 대전 이후에 냉전관계에서 한·미는 특수한 관계를 맺었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이전의 (한·중 간) 수천년의 관계는 어디로 갔나. 현실에 맞게 역사와 문화의 바탕위에서 새로운 갈 길을 조정해 나갈 수 있는 거다."

◆"사드 갈등은 한·중 군사교류를 위해 잠시 뒤로 미뤄놨던 과제"

-그 새로운 관계가 경제와 민간교류 측면에는 많았다. 군사협력 등도 가능하리라 보나?
"25년 전 한·중수교 교섭 과정은 비밀교섭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양국 군사관계 등을 개입 시키지 않고 외교 교섭으로 먼저 수교를 타결시킨 것이었다. 양국의 정치문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군 교류나, 국방전략이 뒤이어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가려져 있던 서로의 입장차가 반드시 나온다. 그것이 사드갈등이다. 드러날 문제가 드러난 것뿐이다. 수교 이후 6년이 지난 1998년 내가 중국 대사로 부임했을 때 역점을 뒀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한·중 국방장관의 첫 공식 교류는 이듬해인 1999년에 터지게 된다."

-당시 한·중 국방장관 첫 교류 이야기를 해 달라.
"1998년 중국 대사로 부임하자 탕자쉬안(唐家璇) 당시 중국 외교부장(외교장관)을 만나 국방부장(국방장관)이었던 츠하오톈(迟浩田)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장관을 안 만나겠다고 했다. 그렇게 중국 외교부의 주선으로 츠하오톈 장관을 만나게 됐고 한·중 국방장관 교류를 공식 제안했다. 그러자 중국측이 MD 체계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일시 귀국해 조성태 당시 국방장관을 만나 MD 문제를 조금 미루고 한·중 국방장관 교류를 조속히 실현하는 등 한·중국방장관의 교환방문을 제의했다. 그렇게 조 장관은 한·중수교 6주년을 기념해서 1999년 8월23~27일 중국을 공식 방문한다. 조 장관은 중국 국방의 3군 열병사열까지 모두 받으며 한·중국방 교류가 첫 물꼬를 텄다. 그 후 MD 문제는 쏙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사드가 터진 거다."

-사드 갈등,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사드 문제는 우리가 상상을 하면 상상할수록 심각한 문제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사드는 '장강에 바늘 하나 빠진 것' 정도밖에 안된다. 이 문제는 언제 나와도 나올 문제였지 않나.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그 많은 시간 동안 대비하지 않고서 왜 이제와서 야단인가. 하지않은 숙제를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한다면 (사드갈등)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하루라도 빨리 양국이 앉아서 '내 형편, 네 형편' 이야기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25년 전 한·중수교 회담 하듯 한·중 대표들이 마주 앉아 담판을 시작하라 이거다. 충분히 해결되리라 본다. 백년의 벽도 뚫고 수교 했지 않나."

◆25년 전 한·중관계는...

-요즘 한·중관계에 비할수 없을 만큼 당시 한·중 간 협상은 어려웠을 것 같은데.
"25년 전 당시 처음 교섭시작 했을때 깜깜한 암중모색(暗中摸索)에 촛불하나 들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당시 한·중양국 1세기 간 관계가 단절되고 준전시상태였지 않나. '수교 교섭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맨 몸으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격이었다. 그 호랑이 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지도도 없고 지침도 없었다. 우선 철저한 비밀교섭이었다. 비밀이 새기만 하면 다음날로 담판은 깨지고 그 책임은 정부의 최고위 층까지도 져야 하는 것이었다. 북한 김일성이 가만 있겠나. 김일성도 우리의 협상은 몰랐다. 알려지게 된다면 중국이 얼마나 곤혹스럽겠나. 우리에게도 대만이 있었다. 미국이 뒤에서 보고 있었고 일본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교가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았나. 막상 베이징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댜오위타이에 연금된 것 같았다. 상황을 보니 중국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장루이제 대표에게 '책임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하자 저녁 무렵 중국측 쉬둔신(徐敦信) 외교부 부부장(차관)과 실무를 담당하는 장팅옌(張庭延) 아주사(亞洲司) 부사장이 나왔다.

-그런 이후의 협상이 순탄했을리 만무하다.
"사실 중국측은 수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협상을 개시해 보니 중국 측 입에서는 '수교'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중·한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내가 일부러 수교 이야기를 했는데도 더 이상 진전시키기 어려웠다. 진전시키려면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그 이후에 협상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받은 훈령은 그 전에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서 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흥정을 하고 합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진전이 안되자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댜오위타이 13호각에 '마오타이'가 나오더라. 술을 잘 먹지 못하지만 '맨정신으로는 상당히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다. 또 나는 2~3일이라는 시한이 있었다. 술을 많이 권하고 많이 마셨다. 술이 되자 나는 '그 뒤에 숨어서 지령하시는 분, 숨어있지 말고 이 자리에 나오시라' 했다. 그러자 중국도 같은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쉬둔신 외교부 부주장이 나왔던 거다. 물론 이날도 술을 꽤 많이 했다. 그런 후 3차 예비교섭을 서울에서 했고, 1992년 8월 24일 댜오위타이 국빈관 팡페이위안(芳菲園)에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이 한·중 수교에 정식 서명했고 이 장면은 전 세계에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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