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칼럼] 소설 <세 여자>로 들여다 본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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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초빙논설위원 ·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입력 2017-08-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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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영희]


장영희 초빙논설위원 ·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소설 <세 여자>로 들여다 본 8월

한반도가 쩔쩔 끓고 있는 요즘 폭염에 지쳐 도통 어디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럼 바캉스가 아니라 ‘북캉스’를 갈까나.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만권의 책을 읽으면 신들린 듯이 글을 쓸 수 있다(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고 했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휴가철 독서여행 쯤의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 <세 여자 1, 2>(조선희, 한겨레출판)를 잡았다.
20세기 초 경성, 상해, 모스크바, 평양을 주무대로 세 여자가 꿈꾸었던 지옥 너머 봄날의 기록! 과연 입소문대로 그 파란만장한 삶에 푹 빠져들었다. 가마솥 더위를 잊을만큼. 소설의 주인공인 '세 여자'는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주세죽·허정숙·고명자 트로이카였다. 당시‘조선공산당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박헌영·임원근·김단야 세 남자는 세 여자의 혁명 동지이자 남편 혹은 연인이었다. 조선희 작가는 우리가 몰랐던 세 명의 여성 혁명가, 이들의 존재를 순탄하고 매우 절제된 문장으로 21세기 우리 앞에 불러냈다.
세 여자가 살았던 때는 역사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 말 그대로‘헬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 여자는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된다고 믿었다.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항일 투쟁에 몸을 던졌다.
소설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1925년 어느 여름날, 당시로는 파격적인 단발을 한 세 여자가 청계천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을 담그고 물놀이하는 해맑은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한·소 수교 다음 해인 1991년 박헌영과 주세죽의 딸이며 소련의 모이세예프 무용학교 교수인 비비안나 박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그녀가 들고 온 여러 장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진은 작가로 하여금 세 여자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단초가 되었고 역사기록에 근거해 이들이 막 스무 살 남짓이었던 1920년부터 거의 40년간의 삶을 복원한다.
세 여자의 삶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프리즘 구실을 한다. 허정숙은 해방 후 김일성의 측근으로 38이북에, 고명자는 남쪽에 남아 여운형 옆에 있었다. 주세죽은 재혼한 김단야가 스탈린 치하에서 일제 밀정으로 몰리면서 유형수가 되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전 남편 박헌영이 끝내 구명을 외면해 죽을 때까지 유형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이들은 혁명의 여정에서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남편과 아이를 잃고 마침내 모스크바와 경성, 평양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이들은 항일투쟁과 해방공간 역사에서 작지 않은 흔적을 남겼지만 지금껏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이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이중소외’라는 말로 표현한다. 냉전시대 사회주의 계열 인사는 조명이 덜 되거나 묻혔는데, 여자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묻혔다는 것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의 추서 시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승만과 김구는 각각 1949년과 1962년에 받았지만 좌익 인사인 여운형은 2008년에 와서야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끝모를 비운의 주인공 주세죽 역시 사후 고르바초프 정권에서야 복권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작가가 강조하듯이 소설의 주인공은 세 여자임과 동시에 ‘역사’가 또 다른 주인공이다. 세 여자의 삶은 조선 공산주의운동사, 나아가 식민지배와 해방전후 격동의 근현대사로 연결된다. 광복절이 있는 8월이어서 더 그랬을까?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다룬 2권에서 유독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해방에는 강대국의 힘이 작용했다지만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좌우 진영이 극렬한 친탁과 반탁운동으로 허비한 것이다. 특히 남한에서 반탁 구호는 과거 친일파의 죄도 사하여줄 만큼 주술적인 힘을 발휘한 새로운 애국 인증이었고 반탁운동은 해방공간의 모든 현안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돼버렸다.
기실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의 핵심은 신탁통치가 아니었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소련·영국·중국은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였고 얼마든지 통일정부를 수립할 여지는 살아 있었다. 반탁의 물결로 뒤덮힌 조선 땅에서 신탁통치에 대해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정치인은 단 두명 몽양 여운형과 고하 송진우 뿐이었다. 그러나 한민당 대표 송진우는 1946년초 암살된다. 몽양도 1947년 7월 열 번째 테러로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 몽양과 명자의 대화로 처리된 대목(2권, 124쪽)에서 몽양의 예견은 현실화된다. 남북통일 정부 수립이 멀어지고 남북내전(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몽양은 반탁 극우인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무리를 지어 상대방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DNA라도 되는걸까? 항일투쟁 국면에서도 그랬지만 해방공간에서 통일정부를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정치인들은 상대 진영을 헐뜯고 죽이는데 날을 지새웠다. 흔히 당파 싸움으로 인한 재앙,‘당화(黨禍)’로 조선이 망국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정치인들만 그랬을까? 숙종실록 같은 옛 문헌을 보면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곤장 1백대와 3천리 유배 같은 사형 다음으로 엄한 형벌을 가했음에도 건송(健訟:하찮은 일에도 소송 걸기 좋아함)과 호송(好訟)이 맹위를 떨쳤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승복할 수 없는 문화는 해방공간에서도 극에 달했는데 어째 기시감이 든다. 여의도 공간을 들여다보면 말이다.
조작가의 지적처럼 지금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딜레마는 분단과 전쟁이후 분단의 고착화에서 비롯했고 우리는 지금도 해방공간의 연장선상에 살고 있다. 2017년에도 분단이 가져온 악몽을 꾸고 있고 실제적이고도 물리적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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