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당일기, 김지영칼럼] 8월이여, 아도서숙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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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초빙 논설위원(동양대교수·전 경향신문 편집인)
입력 2017-08-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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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여, 아도서숙이여

 

초빙 논설위원(동양대교수·전 경향신문 편집인)


8월은 일제로부터 나라와 민족이 해방된 달.
‘흙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절 노래는 이렇게 그날의 감격을 되새기고 있다.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가는 물도리동, 무섬마을 사람들은 아마 올해 8월도 이렇게 노래하고 싶을 것이다. ‘백사장 모래도 다시 만져보자/ 내성천도 춤춘다’
무섬은 일제강점기 동안 온 마을 주민이 치열하게 저항했던, 영주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 작은 마을(시기에 따라 40여 가구~80가구)에서 서훈이 된 이들만 다섯 분이다. 김화진·김종진·김계진(건국훈장 애족장), 김성규·김명진(건국포장). 이들 외에도 박찬하 등 여러분들에 대해 현재 서훈이 추진되고 있다.
무섬마을 청년들의 독립운동은 1927년부터 서서히 전개된다. 이런 가운데 김성규(조지훈 시인의 장인)가 그해 11월 영주 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석달 뒤 해우당 출신 김화진이 일본에서 귀국, 역시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이 된다(김화진은 필자의 종조부다).
김화진의 귀국으로 무섬마을은 물론 영주 지역 전체의 항일운동은 크게 활기를 띠게 되고, 그는 곧 영주 항일운동 지도그룹의 일원이 된다. 당초 18세 때 도일해 진학예비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그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을 목도하고는 진학을 포기, 조선인 차별 철폐 운동을 벌이며 본격적으로 반제국주의·반식민지 투쟁에 뛰어들었다.
무섬마을 항일운동의 특징이라면 대대로 양반이었던 집안의 청년들이 엄격한 반상(班常) 계급 체제를 스스로 박차고 나서면서 주민 모두의 힘을 모으는 대개혁·개방 노선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김화진이 있었다.
필자 모친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시숙부님’(김화진)은 해우당의 큰 사랑채 누마루에 징을 걸어놓고는 가끔씩 이를 크게 쳤고, 징소리가 울리면 주민들이 누마루 아래 마당에 운집하곤 했다. 그럴 때면 김화진은 일장연설을 했는데, 주로 주민들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하는 계몽적 내용이었다. 특히 “이제부터 양반과 상놈은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차별해선 안 되고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신념으로 마을에 아도서숙(亞島書塾)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반상과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함께 배우는, 봉건적이었던 당시 풍습에서는 파격적 교육체제였다. 교육목표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자(문맹퇴치) △우리글로 우리를 알게 하자(민족교육) △우리의 얼을 드높여 같이 뭉치자(민족정신 고양)였다. 또 과목은 한글과 농사기술·민족정신 등이었고, 학급은 오전·오후·야간반에 한 학급의 학생은 15~20명 정도로 구성했다. 학생들은 배운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께 토론했다.
무섬마을 청년들은 한편으로 아도서숙을 독립운동의 아지트로 삼고 영주 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 영주농민조합, 적색농조 등의 집행위원장이나 집행위원 같은 간부직을 맡아 집요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국제무산청년데이 기념통지문 살포사건, 어용단체인 순흥청년회 해체시도 사건,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격문 의거 등 이들이 일으킨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당시 모든 국내 항일운동가들이 그랬듯이) 이들은 일경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구류·투옥의 고통에 시달렸다. 김화진의 경우, 1946년 고문 후유증으로 42년의 짧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옥고 6년(기소 20회, 예비검속 30개월), 도피기간이 5년이었다.
격문 의거 때는 무섬 부녀자들이 아도서숙에서 밤새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9월에는 일경 1개 소대가 이곳에서 무섬 청년 18명을 체포해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하기도 했다. 결국 아도서숙은 개교한 지 5년 만인 1933년 7월 일경이 몰려와 불태워 파괴하고 만다.
경북 북부 지방엔 어느 지역보다 많은 전통 유림 마을이 몰려 있으며, 통계가 말해주듯이 이곳엔 항일운동에 온 몸, 온 마음을 바친 충절의 집안이 골골마다 유독 많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도서숙 같은 특이한 형태의 운동 거점은 찾기가 드물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방이 되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왜 관료들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경시하는지. 영주시가 10년 전 무섬마을 재정비 사업을 벌이면서 아도서숙 복원계획을 세웠다가 원인도 모르게 취소한 점, 그 뒤 주민들의 끈질긴 건의를 오랫동안 외면하다 수년 전에야 복원공사를 시작하고서도 3칸짜리 단독건물 준공을 계속 미루고 있는 점, 마을 자료전시관의 항일 독립운동사를 사실과 달리 엉터리로 기술한 점이 이상하다.
몇 해 전 8·15 기념행사라고 아도서숙을 주제로 한 뮤지컬의 대본을 만들었다가 원인 모르게 뒤늦게 전면 수정한 점, 항일 민족운동 마을이므로 8·15 광복절에 독립운동 선열에 대한 추념식이라도 하자는 주민들의 건의는 외면하고 전통마을 백사장에서 3일간 시끄러운 음악 연주 속에 먹고 마시고 춤추는 광란의 ‘블루스 축제’를 여는 점도 이상하다.
물어보면 답변은 언제나 ‘예산부족’이나 ‘주민 여론’ 탓이다. 하지만 확인해 보면 번번이 사실이 아니다. 설마 일각의 주장대로 아직도 맥맥이 흐르는 친일관료의 DNA가 있는 걸까? 아니면 일부의 이견과 선거 때의 반대표를 걱정한 선출직 단체장이나 의원들 때문인가?
정말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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