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일터의 원심력을 줄이고, 가정의 구심력을 높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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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훈 기자
입력 2017-08-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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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무숙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민무숙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경이로워요. 그래서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뤘나 봅니다. 그런데 다들 밤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아이들은 누가 키우는 건가요." 최근 한국의 발전 과정 노하우를 배우러 온 외국연수생이 던진 질문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이러저러한 답변이 궁색하게 느껴졌다.

"제발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돌보지 않을 수 있도록 어린이집 좀 늘려주세요. 이 나이에 부부가 생이별입니다." 남보다 조금 일찍 외손녀를 보게 된 50세 후반 남성공무원이 하소연하던 말이다. 어떤 대답을 할지 당황스런 순간이었다.

일과 가정, 혹은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 중요한 화두가 된 지 10년이 넘었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저출산시대를 맞아 여성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키 위해 근로자들의 직장·가정생활 양립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 여겼다. 기존의 남녀고용평등법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로 전면 개정한 게 2007년 3월이다.

이후 10여년간 많은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보육시설 확충에 대대적인 정부재정이 투입됐다. 소득, 근로 여부와도 연계하지 않는 무상보육 정책까지 시행됐다. 직장어린이집 설치에 대한 의무화와 지원 확대, 야간보육 및 24시간 어린이집도 크게 늘어났다. 시설보육이 채우지 못하는 시간의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해 시간제 아이돌보미 사업을 정부가 나서 운영하게 됐다.

이 정도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양적 메뉴는 거의 다 제공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경제성장을 이끄느라 '시간 빈곤'에 시달려온 베이비붐 세대들이 은퇴 후에도 자신의 시간을 '황혼 독박육아'에 바치고 주말·월말 부부까지 감수하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애초부터 정책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일터의 강한 원심력은 그대로 둔 채 돌봄의 사회화란 명제 하에 공적서비스와 재정만 투입한 것은 아닐까. 늦은 밤, 심지어 주말까지 이어지는 장시간 근로관행을 맞춰줄 수 있는 공적서비스 제공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정투입은 막대하게 늘었으나 불만은 줄지 않았다. 200만명에 가까운 경력단절 여성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올해 출생아 수는 작년의 40만명보다 낮은 36만여명으로 예측되고 있다. 전체 임금근로자의 42% 수준인 약 930만명이 시간빈곤 상태에 있고, 그중에서 절반이 넘는 510만여명은 여성이며, 맞벌이 가정에서도 88%가량이 시간 부족을 겪는다고 한다(한국고용정보원, 2014).

노동시장의 원심력 세기가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투입정책이 장시간 근로관행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아닐까 의구심마저 든다. 국정과제에는 빠졌으나 '칼퇴근법'을 지나치지 말고 토론해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도 많은 여성근로자들은 퇴근 후 또 다른 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 남성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눈총 받는 소설 속 '82년생 김지영'. 여성에서 엄마로의 이동이 자신만의 마이너스 게임이란 생각에서 더 이상 일·가정 양립이라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일터의 원심력을 줄이고 가정으로의 구심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인프라를 사회 전반에 마련해야 한다. 정책의 무게중심을 가정으로 이동시킬 때이다.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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