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 왕소군(王昭君)은 불행한 여인이었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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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7-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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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영웅에 이어 미인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보자.
중국 내몽골의 성도 후흐호트(呼和浩特)에서 필자와 몽골취재팀이 묶었던 호텔의 이름은 소군(昭君)이었다.
이 호텔은 후흐호트가 내세우는 대표적인 호텔가운데 하나다.

[사진 = 후흐호트 중심지]


바로 한나라 황제의 후궁으로서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가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산 여인, 그래서 숱한 일화가 남아 있는 여인의 이름을 딴 호텔이다.
그만큼 왕소군은 내몽골의 역사 속에서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얘기도 된다.

▶ 화친정책의 산물, 화번공주
한나라는 묵특에게 무릎을 꿇은 이후 오랫동안 흉노를 달래는 화친정책을 계속해 왔다.
그 화친 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혼인을 통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책이었다.

후세 중국에서는 이처럼 주변의 이민족에게 시집간 중국의 공주를 화번공주(和蕃公主)라 불렀다.
즉 오랑캐(蕃)와 평화(和)를 유지하기 위해 보내진 외교사절과 같은 공주라는 의미다.
말하자면 정략결혼의 산물이 바로 화번공주였다.

고려가 나중에 몽골의 영향권에 들어서 몽골의 부마국이 됐을 때 여섯 명의 충(忠)자 달린 왕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첫 번째인 충렬왕의 부인은 ‘쿠두루칼리미쉬’라는 긴 이름을 가진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의 친딸이었다.
고려에서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로 불렀던 이 여인도 중국은 아니지만 몽골에서 화번공주의 성격으로 고려에 보내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예외지만 대부분 화번공주로 보내지는 여인이 실제 공주인 경우는 드물었다.
말하자면 무늬만 공주였다는 얘기다.

고려의 경우도 이후에 보내지는 여인은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에 이르기까지 실제 대칸의 딸, 공주는 없었다.
그러니까 화번공주는 넓은 의미에서 중국이 정략적으로 이민족의 군주에게 출가시킨 공주나 후궁, 황족의 부녀자를 모두 포함해 부르는 명칭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묵특 시대로부터 170여 년이 지나 한나라 원제(元帝)의 후궁으로서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왕소군 역시 공주는 아니지만 실제로 화번공주와 같은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사진 = 왕소군과 호한야선우]


중국 측의 시각에서는 왕소군(王昭君)을 비운의 여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왕소군은 불행한 여인이었을까?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 화려하고 행복한 삶을 산 여인이 아니었을까?

▶ 중국 역사 속 4대미인
중국 역사가 꼽는 4명의 대표적인 미인이 이 왕소군과 함께 서시(西施), 초선(貂蟬) 그리고 양귀비(楊貴妃)다.

▶ 와신상담(臥薪嘗膽)에 이용된 서시
서시(西施)는 기원전 6세기, 2천 5백 년 전의 여인이다.
4대미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그녀의 본래 이름은 시이광(施夷光)이다.
하지만 항주 출신 여인으로 서호 서쪽에 산다고 해서 서시, 또는 서자(西子)로 불렀다는 기록이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나온다.

당시 항주(杭州)에는 월(越 )나라가 있었고 소주(蘇州)에는 오(吳)나라가 있었다. 앙숙이었던 두 나라는 전투가 잦았다.
오왕 합려(闔慮)는 월왕 구천(句踐)과의 전투에서 패해 숨을 거둔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죽음을 잊지 않고 복수하기 위해 울퉁불퉁한 장작위에서 불편한 잠을 잤다.
이것이 와신(臥薪)이다. 다음 전투에서는 월의 구천이 져서 항복을 한 뒤 복수를 다짐한다.
음식물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 쓴 쓸개를 핥으며 기회를 노린다. 이것이 상담(嘗膽)이다.
와신상담의 고사가 그래서 생겨났다.

월의 구천이 부차를 무너뜨리기 위해 보낸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서시다.
구천의 의도대로 부차는 서시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 하고 국력을 쇠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오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효빈(效顰)’이나 ‘빈축(嚬蹙)’이라는 말은 모두 서시로부터 나왔다.
두말 모두 미녀 서시가 찡그리는 모습을 추녀가 보고 따라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시의 아름다움을 주로 침어(侵漁)라는 말을 대표된다.
이는 서시가 빨래하는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물속에 가라앉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경국지색과 폐월-초선
초선(貂蟬)은 대부분 사람들이 한번 이상 읽은 적 있을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가장 잔인한 독재자는 동탁(董卓)이다.
그리고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무장은 여포(呂布)다.
여포는 관우, 장비, 유비가 한꺼번에 덤벼도 이기지 못한 인물이다.

여포는 명마 적토마에 혹해 양부(養父) 정원을 죽이고 동탁에게 투항한다.
초선은 양아버지 사도 왕윤(王胤)에 의해 여포와 동탁에게 바쳐진 인물이다.

왕윤과 초선은 연환계(連環計)와 미인계(美人計)를 통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시키고 마침내는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죽여 버린다.
그 둘 사이에서 초선은 기지를 발휘해 간흉을 제거하는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를 읽는 독자들에게 칭송 받는 인물로 부상한다.
나중에 여포가 조조에게 목이 달아난 뒤 초선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선은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만 실제 역사에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까 다른 세 명의 미인들과 달리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삼국지연의의 작가인 나관중(羅貫中)이 희미한 역사적 근거를 최대한 찾아내서 이야기의 생동감과 흡인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 인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너무도 아름다워 달도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린다는 폐월(閉月), 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 아름다움으로 국정을 농단한 양귀비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여인으로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죄로 성난 군중들의 강력한 요구로 목숨을 잃게 되는 여인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중독 시키는 아편 꽃에 그녀의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양귀비의 원래 이름은 양옥환(楊玉環)으로 당 현종의 며느리였다.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가 죽자 환관 고력사에 의해 시아버지에게 바쳐진 여인이다.
현종은 한눈에 그녀에게 빠졌지만 곧바로 아들의 여인을 뺏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교(道敎)의 도사로 입문시켜 태진(太眞)이라는 이름의 도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도교 도사를 모셔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그녀를 궁궐로 불러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

도교에 입문하면 과거 속세의 일은 모두 불문에 붙여진다는 점을 이용해 신분세탁을 하는 방법을 썼다.
물론 아들에게는 다른 여인을 얻어 주었다.

현종은 그녀를 귀비로 책봉해 왕비가 없는 궁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60대의 황제가 20대의 여인에게 눈이 멀어 정치를 팽개친 사이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민심은 흉흉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20대 양귀비는 40대의 돌궐출신 장수 안록산(安祿山)을 수양아들로 삼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
그래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이 그를 제거하려 했다.

낌새를 알아챈 안록산은 변방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까지 쳐들어 왔다.
그 것이 바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고 사사명(史思明)이 그 뒤를 이은 이른바 안사(安史)의 난(亂)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 사천 쪽으로 도주 길에 나섰다.
도중에 성난 군중과 일부 병사들이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양귀비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자 현종은 비겁하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양귀비를 내줘서 죽게 만들었다.

현종은 난이 평정된 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책임을 지고 왕의 자리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양귀비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6년을 보내다 78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정사(正史)에서도 자질풍염(資質豐艶), ‘풍성하고 농염하다’라고 적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 양귀비도 결국 경국지색, 미인박명에 어울리는 여인이 됐다.

▶ 의미 있는 삶을 산 왕소군
날아가던 기러기가 땅에 내려앉을 만큼 (낙안:落雁) 아름답다는 왕소군은 앞의 세 미인의 삶이 나라를 기울게 만든 부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과는 달리 나라를 지켜주는 데 기여하고 자신도 의미 있는 삶을 산 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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