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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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07-2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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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유격전의 원칙을 알고 싸우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만큼 유격전(遊擊戰)에 대해 잘 알고 싸운 경찰지휘관은 드물 것이다. 독립군시절 차일혁은 모택동 군대의 유격전을 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차일혁은 모택동(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과 함께 작전을 하면서 ‘모택동식 전법’을 익혔다. 차일혁이 포병전술을 배운 것도 이때였다.

 차일혁의 포병전술은 중공군포병사령관을 역임했던 무정(武亭)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무정은 6·25전쟁 때 북한군을 지원했던 중공군사령관 팽덕회(彭德懷)로부터 ‘홍군(紅軍) 포병의 시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포병전술에 능했다. 홍군은 현재 중국 정규군인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을 가리킨다. 무정도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인민군포병사령관으로 지내다가, 북한이 남침할 때 북한군 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낙동강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던 인물이다.

 모택동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國民黨) 정부군에 비해 수 십 배가 넘는 열세한 병력과 무기체계를 극복하고, 군사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중국대륙을 석권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됐다. 모택동의 군대가 그렇게 된 데에는 장개석 군대의 무능과 부패도 크게 한몫 했지만, 더욱 결정적인 것은 모택동이 공산당 군대인 홍군의 기율(紀律)을 일찍부터 체계화시켰기 때문이다. 병력이나 무기에서 열악했던 모택동은 장개석 군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주로 유격전에 의지하였다. 그런데 유격전을 수행하려면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는 강력한 장개석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모택동은 판단했다.

 모택동의 유격전 핵심은 “민심(民心)을 떠나서는 유격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이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절대 살 수 없듯이, 유격전에서도 주민들의 호응을 얻지 않고서는 군대가 작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전쟁에서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주민들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모택동은 우세한 장개석 군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체 규율을 만들어 이를 엄수하도록 했다. 그것이 바로 ‘삼대규율(三大規律)’과 팔항주의(八項注意)‘였다. 이를 어기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엄중 문책하고, 심하면 총살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중공군의 삼대규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둘째, 주민의 것은 바늘 하나 실 한 가닥이라도 가져오지 않는다. 셋째, 모든 노획품은 공유한다. 팔항주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침구용으로 빌린 문짝을 원래대로 달아 주고 온다. 둘째, 잠자리를 위해 빌린 짚은 그대로 묶어두고 온다. 셋째, 주민들에게 공손히 말한다. 넷째, 매매는 공정히 한다. 다섯째, 빌린 물건을 반드시 돌려준다. 여섯째, 파손된 것은 반드시 변상해 준다. 일곱째, 부녀자들을 절대 희롱하지 않는다. 여덟째, 포로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는다.

 이외에도 모택동은 군기강 확립에 필요한 조치를 추가로 지시했다. 첫째, 신속하게 그리고 이유없이 명령에 복종한다. 둘째, 농민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징발하지 않는다. 셋째, 지주로부터 몰수한 것은 즉시 당국에 가져온다. 넷째, 강도, 강간, 무차별사격과 방화를 저지른 장교와 사병은 총살형에 처한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중국 군대에도 적용되고 있는 규율들이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모택동 군대는 삼대규율과 팔항주의 그리고 군기확립에 필요한 조치들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결국 수 백 만 명에 달하는 장개석 군대를 물리치고, 중국에 공산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장개석 정부는 결국 대륙을 빼앗기고 타이완(臺灣)으로 쫓겨나게 됐다.

 6·25전쟁 때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도 그런 모택동의 유격전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차일혁은 “유격전에서의 승패는 민심을 잘 수습하여 적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부하 대원들에게 늘 가르쳤다. 중국대륙에서 독립군 운동을 할 때 중공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수행했던 차일혁은 알고 보면 ‘유격전의 대가(大家)’였던 셈이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철저히 주민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빨치산의 꼬임에 빠져 차일혁 부대에게 상당할 정도의 위해(危害)를 줬던 산간부락의 주민들에게 보복행위를 하지 않았던 것도, 민심을 떠나서는 유격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일혁이 제18전투경찰대대의 대대장으로 특채된 것도 결국은 차일혁이 유격전에 정통하다는 것을 전북도내 군과 경찰수뇌부에서 인정했기 때문이다. 차일혁도 자신의 성공적인 빨치산 토벌의 이면에는 중국에서의 항일유격대 경험이 뒷받침됐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유격전에 대한 차일혁의 향수는 구이면 전투에서 부하들의 미숙한 전투모습을 보고, “유격전에는 나무 한 뿌리, 바위 하나에서도 승패가 좌우 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차일혁은 빨치산토벌작전을 할 때 빨치산들의 유격전에 대해 ‘대유격전(對遊擊戰)’으로 맞서며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차일혁은 “유격전은 험한 산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규전과는 달리 공격하는 쪽이 먼저 피해를 당한다”는 원칙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빨치산들은 항상 토벌하러 온 경찰토벌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가, 토벌대의 공격방향을 미리 알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기습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빨치산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려 토벌대만 힘을 빼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차일혁은 경험을 통해 그런 빨치산들의 유격전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치산들로부터 주민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의 유격전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들을 토벌했다. 어떤 때는 매복으로, 어떤 때는 빨치산 포로들로 구성된 ‘사찰유격대’를 이용하여 빨치산들을 토벌했다. 차일혁은 빨치산을 토벌할 때 ‘토끼몰이식 전법’을 금기시했다. 그것은 효과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빨치산에게 경찰토벌대를 노출시킴으로써 공격당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은 빨치산들을 토벌할 때 정면보다는 그들의 예상되는 후퇴 지점에 실전 경험이 많은 대원들을 매복시켰다가 공격하는 방식을 취해 전과를 올렸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됐다. 차일혁에게 빨치산들의 ‘모택동 유격전술’은 통하지 않았다. 국공내전(國共內戰)시 모택동의 유격전은 장개석 군대를 패퇴시킬 정도로 위력을 떨쳤으나, 어찌된 일인지 6·25전쟁에서 빨치산의 유격전술은 차일혁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빨치산들은 토벌대장 차일혁에게 소탕되는 불운을 겪지 않으면 안 됐다. 남한지역에서 한때 기승을 부리며 대한민국 정부까지 위협했던 이현상의 빨치산부대도 결국 차일혁부대에 소탕됐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빨치산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주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유격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수 없듯이 주민들의 마음을 잃은 빨치산들은 갈 곳이 없게 됐다. 그 결과 차일혁은 대한민국 후방지역을 안정시키고,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오는 위업(偉業)을 이루게 됐다. 그 이면에는 차일혁의 유격전술이 크게 한몫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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