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 최초의 유목민족은 누구인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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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7-2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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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러시아에서 나타난 스키타이 유산
스키타이가 물려준 놀랄만한 기마 전술과 전법은 흉노와 돌궐, 몽골 등 초원의 지배자들에게 이어지면서 더욱 보완되고 다듬어져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스키타이가 초원에서 구사했던 이른바 초토화 전술과 퇴각 전술이 러시아에서 다시 나타난 사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이 초토화 퇴각 전술은 바로 러시아 초원으로 흘러 들어갔던 스키타이가 러시아에게 물려준 유산이라고 일부 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사진설명 : 스키타이유물로 우크라이나 똘드따야 미길라 구프칸 출토 검집장식 상부


러시아는 역사상 큰 획을 긋는 두 차례 전쟁의 승리를 ‘조국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1812년 알렉산드르 1세 때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 벌인 전쟁이었다.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과의 전쟁이었다.

▶ 노장군의 선택-초토화 퇴각전술
1812년 러시아의 ‘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은 쿠투조프(Kutuzov) 장군이었다.
국민에게 인기 있었던 67세의 노장군은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나폴레옹軍을 잡는 초토화 퇴각 전술을 구사하게 된다.

모스크바를 잃는다고 해서 러시아를 잃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내세워 정부와 군대를 설득한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모스크바로부터의 후퇴를 명했다.
이 때 상황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본 사람은 러시아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역사적인 보르디노(Borodino)전투와 나폴레옹군의 모스크바 점령, 모스크바 대화재, 프랑스군의 퇴각 등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인적인 끊긴 모스크바에 남아 나폴레옹을 암살하려다 방화범으로 몰려 포로가 됐던 남자 주인공 삐에르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군이 쉽게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 도시는 텅 비어 있었고 곧이어 도시 곳곳이 불길에 휩싸였다.

다음 단계로 러시아 빨지산(Партизан:특수 유격부대)이 파상적으로 공격해왔다.
텅 빈 도시에서 보급품을 확보하지도 못한데다 파상적인 공격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설상가상으로 혹독한 겨울이 다가서고 있었다.
10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나폴레옹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빠져나가는 길은 더욱 힘들고 괴로웠다.
시도 때도 없이 퇴각로 곳곳에서 출몰한 빨지산과 쿠투조프군은 스스로 모스크바를 초토화 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나폴레옹 군대를 초토화시켰다.

▶ 60만 대군中 3만 명 생환(生還)
러시아 땅으로 들어섰던 프랑스군 60만 명 가운데 겨우 3만 명의 병사만 지치고 병든 몸으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은 종착점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불타는 모스크바에서 식량조차 구할 수 없었던 데다 기습공격에까지 시달리게 된 나폴레옹군의 상황이나 그들이 퇴각하면서 겪은 고초는 시대가 다르고 도시와 초원이라는 장소는 다르지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군대가 스키타이군에게 당했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 1차 조국전쟁과 유사한 2차 조국전쟁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해 들어갔을 때의 상황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비록 여러 상황에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원칙적인 전술 면이나 전쟁의 결과 빚어진 양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스키타이-페르시아 전쟁이나 1812년 1차 ‘조국전쟁’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군은 나폴레옹이 129년 전 러시아를 침공했던 같은 날 소련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마 거기에는 나폴레옹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신이 이루어 보겠다는 히틀러의 야심이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초기 전투에서 히틀러의 야심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소련군은 도저히 독일군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
역경 속에서도 소련군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방어전을 어렵게 수행해나갔다.

▶ 스탈린그라드의 퇴각 함정전술
그리고 결정적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나치 독일을 패망의 길로 몰아넣게 된다.
전쟁터가 된 스탈린그라드는 지금 볼고그라드로 불리는 곳으로 카스피해 북쪽에 있는 볼가 강변의 도시다.

과거 2백년 이상 러시아를 다스렸던 몽골 킵차크한국의 수도로 황금 오르도(Ordo;군주의 숙영지)가 있었던 사라이가 바로 그 곳이다.
또한 과거 스키타이와 페르시아군이 맞부딪친 인근 지역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여기에서 소련군이 구사한 전술도 퇴각 함정전술이었다.
소수의 병력이 도시를 포위한 독일군의 대부대를 도시 중심부로 끌어들여 함정 속에 묶어 놓았다.

그 동안 퇴각한 소련군의 주력부대와 보강된 군은 독일군을 외곽에서 다시 포위한 뒤 보급망을 차단한 채 압박해 들어갔다.
추위에다 부족한 보급품에 시달리는 독일군을 상대로 이 전투의 영웅 주코프(Zhukov)장군은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6개월 동안 독일군 사망자만 백만 명이 넘어섰다.
시가전에서 죽은 독일 병사만 해도 15만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2차대전의 전환점이 된 전투
역사가들은 이 전투에서의 소련군 승리와 독일군 패배는 2차 대전의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한다.
독일군이 유럽서부 전선에서 입은 인적 손실이 백만 명 정도인데 비해 동부 소련전선에서의 손실이 6백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만 봐도 이 전쟁에서의 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퇴각을 통한 유인 전술로 적을 곤경에 빠뜨린 뒤 공격하는 전술은 어느 경우에나 비슷하게 나타난다.
어떤 강력한 군대이건 간에 들어서기는 쉽지만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점도 비슷하다.

한 차례 당한 뒤 상대방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점에도 공통점이 있다.
이는 옛 스키타이 땅을 차지했던 러시아가 비록 유목민족은 아니지만 스키타이가 구사했던 전술을 그들의 특유한 상황에 맞춰 적용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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