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외로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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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07-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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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酒食雜記
칼럼니스트

외로운 친구
에베레스트는 외롭다. 혼자 높은 것이다. 달리는 황영조도 외롭다. 혼자 앞선 것이다. 호랑이도 외롭다.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소나무도 잣나무가 없으면 쓸쓸하다. 혼자 무성하면 무엇 하나. 기뻐해줄 잣나무가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송무백열(松茂柏悅)이다. 친구가 없다면, 세상 속에 혼자인 것이다.
부처도, 공자도, 예수도 그랬던 것일까. 몇 년 전 ‘슬픈 붓다, 슬픈 공자, 슬픈 예수’란 제목의 세 권 연작이 나왔다. 당대의 전문가들이 지었는데, 테마를 ‘슬픈’으로 묶었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인간의 도리를 세우고, 사랑으로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 정신적 스승들이 모두 슬프다는 것이다. 왜일까.
붓다는 ‘세상 밖에서 공동체를 꿈꾼 이상주의자’라 했다. 공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위대한 스승’이라 했다. 예수는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래서 슬프다는 건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공동체를 꿈꾸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알아주며,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아니라 순응의 길을 걸었더라면 슬프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인가.
아마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슬픈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친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이들은 부모 형제도 있고 따르는 제자도 많았다. 하지만 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가르치거나, 이끌거나, 깨우쳐야 할 민중과 백성과 중생들 속에 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들도 외로웠을 것이다. 사기열전에 따르면 어느 날 공자가 노자를 찾아간다. 신물이 난 사제관계를 벗어나 흉금을 터놓는 친구관계를 바랐을지 모른다. 한데 노자는 ‘고니는 본디 희고, 까마귀는 원래 검다’며 내친다.
공자가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인생살이에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걸 지적한 것이다. 흰 것이 좋고 검은 것이 나쁘다면, 고니는 항상 선하고 까마귀는 악한가. 그렇게 태어난 것인데 어쩌란 말이냐. 흑백은 선악이 아니다. 그냥 두어라.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머쓱해진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노자는 마치 용과 같아서 가늠하기 어렵다고. 아마도 공자는 절대 고독을 느꼈을 것이다. 뭔가 통할 것 같았는데, 그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면박만 당한 것이다. 이런 심정이 논어(論語)의 첫머리 학이(學而)편에 담겼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주석자들은 공자가 면학, 즉 학문의 기쁨을 말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가 없다’는 고백이 아닐까. 친구와 벗하여 한잔 술을 기울이며 서로 흉금을 터놓고 즐기고 싶은데, 친구가 없으니 어쩌랴. 책을 벗하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뜻으로 읽힌다.
바로 다음에 공자의 본심이 드러난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렇다. 앉으나서나 배움을 이야기하던 공자가 느닷없이 ‘친구’ 타령이다. 그 다음 줄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愠 不亦君子乎)’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답지 아니한가. 두 줄을 연결해서 보면, 친구가 찾아오면 기쁜데 나는 친구가 없다. 나도 알고 보면 친구가 그립고, 족히 더불어 친구 할 만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라준다. 그저 어렵게만 생각한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외로운 군자’로 자처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대목, 군자론을 펴는 공자에게서 사무치는 외로움과 진한 슬픔이 느껴진다. 가장 앞선, 가장 우뚝한 정신적 스승에게는 어깨를 같이 할 친구가 없는 것이다. 붓다와 예수도 친구가 그리웠을 것이다. 서로 어깨동무하고 부대끼며, 배반낭자(杯盤狼藉) 취해보고, 스스럼없이 흉도 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붓다가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결국 자신을 대체할 다른 자신은 없다는 뜻일 게다. 결국 판단과 결정의 주체는 자기자신이다. 헤르만 헤세도 ‘안개 속에서(Im Nebel)’를 통해 ‘모든 사람은 혼자’라고 되뇐다. ‘삶은 본디 외로운 것이고, 아무도 다른 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친구는 우정이, 연인은 애정이 고프다. 다가가지만, 항상 저만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본디 외롭기 때문에 관계를 추구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사회적’이란 용어에서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언제나 혼자인 인간을 본다.
공자는 친구가 찾아오면 기쁘다고 했지만, 이 말을 뒤집으면 친구를 찾아가면 기쁨을 준다는 뜻이다. 예수 말씀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대접해야 하는 법. 친구가 그립다면 먼저 찾아가야 한다.
“산아, 내게로 오라!” 마호메트의 이산(離山)의 기적은 산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자신이 산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기적이 완성된 것이다. 외롭다면 먼저 찾아가라. 친구라면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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