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사망 류샤오보, 험난했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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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성 베이징특파원
입력 2017-07-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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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보[사진=연합/AP]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중국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상징인 류샤오보(劉曉波·61)가 13일 오후 9시께(현지시간) 사망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사법국은 인터넷 홈페이지 공지문에서 병원에서 간암 치료를 받아온 류샤오보가 지난 10일부터 중태에 빠지더니 13일 오후 다발성 장기기능 상실로 숨졌다고 밝혔다. 류샤오보를 치료해온 선양 소재 중국의대 부속 제1병원은 "12일 오후부터 류샤오보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돼 호흡 곤란을 겪었으며 신장, 간 기능이 떨어지고 혈전이 생겨 고통스러워하더니 13일 숨졌다"고 전했다. 고난으로 점철됐던 류샤오보의 인생은 비로소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됐다. 

1955년 12월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문화대혁명(1966~1976년) 시기 하방(下放·지식인을 노동 현장으로 보냄)돼 건축공사 근로자로 일했다. 1977년에야 지린대학 중문과에 입학해 1982년 졸업했다. 이어 베이징(北京)사범대학에서 석·박사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그 이후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하와이대학 등에서 방문학자로 지냈다. 

편안한 인텔리의 인생을 살던 그는 1989년 6월4일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당시 고통의 길을 택하게 된다. 톈안먼 사태 발생 당시 미 컬럼비아대학에 머물던 류샤오보는 곧장 중국으로 돌아가 광장시위 단식농성에 가담했다. 인민해방군의 투입과 유혈진압 위험이 높아지자 군간부와 협상을 갖고 학생들을 톈안먼 광장에 철수시켜 희생자를 줄였다. 이로 인해 류샤오보는 '4군자(四君子)'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톈안먼 사건 후 반혁명죄선동죄로 체포돼 1년7개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출소 후 중국에 머물면서 톈안먼사건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그는 공안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됐다. 그는 1995년 5월 베이징 교외에 1년여 감금됐다가 그 다음해 10월 '사회질서교란죄'라는 명목으로 법원에서 3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계속되는 구속과 연금, 감시조치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이어갔다.

베이징올림픽이 개최됐었던 2008년 12월 세계인권의 날에 '08헌장'이 발표됐다. 중국공산당 일당독재포기와 언론의 자유 도입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류샤오보의 주도로 헌장이 발표됐으며, 많은 찬성 서명이 모아졌다. 그는 헌장발표 이틀전 전격 체포됐으며 2009년 12월 국가 전복선동죄를 적용받아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그러나 류샤오보의 이같은 민주화활동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당시 그가 "중국에서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길고 비폭력적인 투쟁을 벌였다"며 "중국 인권 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류샤오보는 노벨상 시상을 할 수 없었고, 노벨위원회 측은 대신 그가 불참한 의자에 메달을 걸어주는 이벤트를 만들기도 했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노르웨이와 중국의 수년에 걸친 외교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수감생활을 하던 그는 지난 5월말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서야 가석방돼 선양 소재 중국의대 제1병원에서 한달여 동안 치료를 받다가 끝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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