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알(R)과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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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병희 -
입력 2017-07-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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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雜記

알(R)과 알바

역사 시간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배울 때다. 명성황후가 무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 일행이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그런데 왜 ‘아관’인가.
당시 러시아의 한자 표기가 아라사(俄羅斯)였다. 줄여 아국(俄國)이다. 러시아 공관도 아관(俄館)이라 했다. 궁금한 게 발음 ‘아’였다. 러시아(Russia)의 어디에 ‘아’ 발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궁금증은 일제강점기 한인 미국유학생들이 발간한 학생잡지에서 풀렸다. 잡지 제목이 ‘우라키’다. 1925년 창간호에 이어 1936년 7호까지 나왔다. 한 권에 50전으로 비쌌지만, 당시 유학생의 생각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목 ‘우라키’는 미국의 산맥 ‘로키(Rocky)’를 발음대로 적은 것이다.
지금처럼 외래어 표기법이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제법 고민한 결과다. 유학생들이 듣기에 ‘로키’ 앞에 분명히 ‘우’ 발음이 들렸던 것이다. 비록 음이 들릴락말락했지만. 그래서 ‘우롸키’로 발음하고 ‘우라키’로 표기한 것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대문자 알(R) 앞에 미세하나마 뚜렷하게 ‘으’ 발음이 들렸다. 그래서 한글로는 ‘으러시아’로 표기했다. 한자로는 중국어 발음 ‘으어’에 가까운 ‘아(俄)’를 붙였던 것이다. ‘아까, 갑자기, 잠시’라는 뜻을 가진 한자인데, 어쩌면 갑자기(!) 강국으로 부상한 점을 감안한 것이 아닐까. ‘으어’란 발음은 서예가 왕희지가 좋아한 거위 아(鵝)도 있고, 주릴 아(餓)도 있는데 말이다.
참, 중국 쓰촨(四川)성의 명산 아미산의 아(峨)도 있다. 아미산은 무협지 9파1방의 일원인 아미파의 본거지이다. 여승들로 구성된 무협 집단인데, 그래서인지 원래 한자표기는 예쁜 눈썹을 뜻하는 아미산(娥眉山)이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종교를 탄압하자 여승들이 떠나고 높은 산만 남아 아미산(峨眉山)이 됐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세계 최고의 표음문자인 한글도 알(R)에는 취약하다. 그래서 알(R)이든 엘(L)이든 똑같이 표기해 버린다. 자연히 강(江)을 뜻하는 리버(River)도 간(肝)을 뜻하는 리버(Liver)도 표기는 같다.
어려우면 아예 빼버린다.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한글 표기에 알(R) 발음은 없다. 미국인은 ‘카터’와 ‘커터(Cutter)’를 구별하기 힘들다. ‘카터’보다 ‘칼털’이 원 발음에 가까울 수 있다.
‘알바’도 그렇다. 발음대로 알바(Alba)는 가톨릭교회 사제가 입는 길고 흰 장백의(長白衣)를 뜻한다. 그러나 독일어 아르바이트(Arbeit)의 준말 ‘알바’에는 그런 경건함 대신 고통만이 느껴진다. 왜일까.
원래 ‘아르바이트’는 전후 독일에서 대학생이 학비를 버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폐허 속에서 휴학하는 학생들이 늘자 대학과 정부가 시간제 일자리를 구해준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가 아닌가. ‘라인강의 기적’도 아르바이트의 산물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이 아르바이트를 줄여 ‘바이토’라 했다. 보통은 ‘콤비'니 ’비루’처럼 앞부분을 살리는데, 뒷부분을 남긴 특이한 경우다. 아마 ‘아루’는 ‘있다, 존재한다’는 뜻과 헷갈리고, ‘아루바’ 하자니 술집이나 카리브해 국가 이름과 혼동하기 쉬워서?
여하튼 우리에겐 고학(苦學)이다. 학비를 스스로 벌어 힘들게 배운다는 뜻이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나온 용어인 듯하다. 1923년 신문에 ‘고학을 목적하고 일본으로 오시려 하시는 여러 형님께’란 글이 있다.
“신문 배달은 조석간을 배달하고 이십원 내외, 밥 사먹고 나면 5~6원으로 근근이 학비는 조달할 수 있다. 우유 배달은 먹고 6~7원이지만 아침저녁으로 일하니 복습이나 예습할 시간이 없다. 변소 소제는 집마다 10~50전을 주지만 창피와 모욕이 말로 다할 수 없다. 인력거는 한 달에 10여 차 하면 학비는 되나 단잠을 못 자고 학교에 간들 강의가 뇌(腦)에 들어갈 이치가 있겠는가. 고학(苦學)에 고(苦)는 있어도 학(學)은 없다.”
미국 유학도 마찬가지이다. 1969년 미국의 국제교육연구소가 파악한 한국 유학생은 모두 3765명이다. 이 중 64%가 접시닦이 고학생이었다.
세월이 흘러 ‘알바’의 시대다. “이런 시급~”이라며 걸그룹 혜리가 찡그렸지만, 아직도 알바로 학비를 조달하기엔 벅차다. 여전히 고(苦)는 있어도 학(學)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알바 자리도 구하기 힘들어 20대 태반이 백수인 ‘이태백’이다.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 입구에 ‘아르바이트(노동)가 자유를 준다(Arbeit Macht Frei)’는 글귀가 붙어 있지만, 우리는 안다. 결코 자유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의 아르바이트, 알바도 마찬가지다. 만원도 안 되는 시급으로 젊은이들의 꿈을 가두는 ‘청춘 수용소’다. 알바 천국이 ‘알바 지옥’으로, 알바몬은 ‘알바 몬스터(괴물)’로 들린다. 여전히 알은 깨기 어렵고, 알바는 벗어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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