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칼럼] 프로듀스101이 말해주는 것과 말해주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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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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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문화마당-정병욱의 음악이야기


정병욱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선정위원


 

[사진=정병욱]



프로듀스101이 말해주는 것과 말해주지 않는 것

‘국민 보이그룹 육성 프로젝트’라는 부제로 두 달여간 방영된 Mnet '프로듀스101 시즌2'가 6월 16일 종영했다. 작년 시즌1이 시작 전부터 갖은 논란으로 예방주사를 맞은 덕인지 올해 방송에 대한 일방적 비판은 많이 누그러졌으며, 시청자의 충성심은 오히려 깊어졌다. 공개영상 누적 조회 수가 한 달 만에 전 시즌 전체 조회 수를 넘었고, 각종 검색어 순위와 콘텐츠 영향력 지수는 수주 동안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무엇보다 20대 시청자를 구 미디어인 TV 앞으로 이끌어 동 시간대 20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거나, 30~40대의 여성 시청자까지 사로잡는 등 제작진과 참가자를 넘어 시청자까지 고무시킨 모양새다.

11명에 들고자 하는 101명 연습생의 처절한 생존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방송의 과도한 선정성과 참가자 개인에 대한 무책임한 폭력성이 여전히 눈에 밟히는 것은 사실이다. 방송사에 집중된 권력, 지나친 이미지 소비와 같은 시스템의 부정적 일면을 차치하더라도 한정적인 방송 분량 내 노출 빈도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공정성에 대한 논란은 “국민이 선발한 아이돌을 데뷔시킨다”는 방송 근간에 대한 신뢰마저 뒤흔든다.
그럼에도 나는 '프로듀스101 시즌2'를 그저 외면할 수도, 이 프로그램이 없어져야 한다며 적극 거부할 수도 없다. 방송이라는 핑계로 현실보다 지독한 생존경쟁을 웃는 낯으로 견뎌야 하는 아이돌 연습생 피해자에게 몰입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돌 문화에 익숙하든지 않든지 그것을 이 시대가 소비하는 가장 대표적인 문화형식 중 하나이자 하나의 유기적 구성체로 인정하는 입장에서, 한국음악과 K팝의 미래를 만드는 역사의 주인공들을 응원하며 바라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음악 아닌) 음악 산업이 의미상 한정된 청각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감각의 생산·소비 활동으로 진화했고 나아가 이야기와 공감 차원까지 확장되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시대마다 대세가 된 각기 다른 미디어가 음악을 누리는 각색의 방법을 낳았으며 '프로듀스101 시즌2'는 다각적으로 비튼 일종의 재미를 선택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가자가 내몰린 잔인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이들에게 직접 꿈과 희망의 동아줄을 내려주라며 방영 전부터 실시한 투표만으로 결과를 만들어간 점은 시청자에게 어느 때보다 방송의 스토리에 몰입하게 했다는 점에서 앞서 반복된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른 영리함이 읽힌다. 101명이라는 과도한 숫자에 대한 반감은 거꾸로 포화와 범람을 넘어 절대다수의 낙오자와 잉여를 낳고 있는 아이돌 정글 속 한 줄기 기회와 구원으로 비치기도 한다. (변화된 투표 방식에서도 기인하지만) 이에 따라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저마다의 취향과 관점이 더 치열하게 맞물린다는 사실은 지난 시즌보다 극적으로 변화했던 투표 결과의 상위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근래 지하철 역사 내 전광판을 점유하고 있는 방송 참가 연습생들에 대한 응원 메시지들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확신이 분명해진다.

'프로듀스101 시즌2'가 음악콘텐츠의 내실 없이 미디어와 포맷의 힘만 빌린 것도 아니다. 지난 시즌의 주제곡인 'Pick Me'(“···나를 붙잡아줘··· 꼭 안아줘··· I want you pick me up···”)가 ‘선택을 갈구하는 소녀들의 아이돌 음악’이라는 당대 개별 언어와 방송의 자극적인 콘셉트를 강력하게 호소하고 소비하게 하는 단순도구였다면, 이번 시즌의 '나야 나'(“···오늘 밤 주인공은··· 네 맘을 훔칠 사람 나야 나···”)는 보다 섬세한 사운드 프로덕션과 선택을 염두에 두면서도 가사의 주체성은 개인에게 돌려낸 가사로, 이들이 단순한 ‘101명의 거대한 덩어리’라는 거부감을 덜어냈다. 10여년 대중음악의 중심이었던 아이돌 음악의 가치를 적절한 선곡으로 재생산하였으며, 방송 오리지널 트랙 역시 지난 시즌의 기준을 웃도는 작곡의 퀄리티로 아이돌 문화의 과거 소비자였거나 현재 그 경계 바깥에 있었던 대중까지 끌어들였다.

물론 이 같은 변명이 방송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대중은 투표권을 통해 연출자가 이양한 권력을 자신이 획득했다고 신뢰하지만, 권력 행사방법이 온전히 규정되지 않은 그 힘은 잘못된 방식으로 분출되거나 도리어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의 약자로서 무력감을 더욱 강화하기 일쑤이다. 자기 인생을 건 듯 간절히 매달리고 벌벌 떠는 연습생들의 모습이나, 강력한 팬덤이 인터넷 커뮤니티 및 각종 SNS 미디어와 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전쟁터에서 다른 참가자나 팬을 적으로 상정하고 상대를 물어뜯는 모습을 목도하는 건 단순한 예능프로그램 시청을 넘어선 괴로움을 준다. 눈에 비치는 것이 작금의 한국음악이나 K팝의 전부인 양 착각하게 하는 것도 문제다. 본 방송 이후 이어질 힙합 오디션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리즈의 가상세계가 한국힙합의 전부가 아니듯 '프로듀스101 시즌2'의 음악세계가 한국음악의 현재나 댄스음악 기반의 주류 음악·아이돌 음악 그 자체를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방송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시청자가 참가자를 대하는 시선은 권력자와 시스템의 입장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 한국음악과 음악산업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에 훨씬 다양한 참가자들이 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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