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당일기] 김지영 칼럼, 절반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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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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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지영]



어느새 올해 1학기 강의도 끝났다. 그러고 보니 고향 영주의 무섬마을에 있는 큰집(해우당·海愚堂)에 기거하며 이 지역 동양대에서 강의를 한 지도 1년이 돼 간다.
고향이라지만, 실상 내가 무섬마을에서 1년이나 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생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았던 것이다. 고향은 방학 때 또는 집안 행사나 있을 때 찾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고향은 나에게 꿈이나 환상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리움이었으며 풍경이었고 전설이었다. 고향을 찾을 때면 마을로 흘러드는 내성천 줄기를 먼저 만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 고향으로 주민등록 주소도 옮기고 1년을 지내자, 고향은 나에게 현실이 되었다. 풍경 속에 들어간 나는 그 풍경이 되었으며 고향은 전설에서 다큐로 바뀌었다.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마을 어귀 강가에 이르러도 이제 가슴이 뛰는 생리현상은 생기지 않는다.
귀향이다.
하지만 아직 고향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강의 준비를 하고, 매주 하루 강의를 하는 일 외에 내가 고향에서 전업 삼아 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본격적인 농사란 나로선 엄두롤 내지 못하는 일. 그저 댓평 남짓한 텃밭을 가꾸며 집 안팎에 약간의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정도가 나에겐 ‘전원의 일’이다. 당초부터 내가 귀향하고자 했던 동기도 ‘귀농’은 아니었다.
사실 큰 동기는 큰집인 해우당을 돌보는 일이었다. 해우당은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조선 한옥으로, 오래전 마을에서 첫 번째로 지방 문화재가 되었다(지금은 무섬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민속 문화재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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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흥선대원군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연유로 대원군의 유적이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에 영주 항일운동의 주요거점이었던 집으로서 근대 역사의 격랑, 그 흔적이 서린 곳이다.
그런데 큰집은 어느 순간부터 점차 빈집이 되어갔다. 집안 종반 모두가 도시에서 생업에 바쁜 터라 누구도 외진 무섬마을의 큰집에서 상주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종반들의 수시 방문관리로는 제대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잘 알려진 대로 집이란, 특히 한옥은 사람이 상주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자칫 더 방치했다간 해우당은 건물과 함께 그 역사도 함께 스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절로 생겼다.
나는 1년 전 서울의 직장에서 퇴직을 하기에 앞서 해우당에 기거하며 집을 돌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곳의 대학에 초빙교수 자리를 얻게 됨으로써 귀향을 결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절반의 귀향’이다. 거의 매주 서울 출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주 하루 강의를 하는 일. 해우당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청소하고, 문화재단체나 시당국과 협의해 크고 작은 보수를 하는 일, 텃밭과 꽃밭을 가꾸는 일로는 귀향생활 프로그램을 채우기가 부족했다. 서울에 볼 일도 적지 않았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내가 영육간에 말년이 되지 않았거나 말년에 이르렀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귀향을 하고도, 아직 고향산천에 몸을 기대어 관조하면서 지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고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아아~~~편안하다/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편하다···“고 했다. 고 박완서 선생도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라고 했다. 나에게 아직 그분들의 심경이 들지 않은 걸 보면 말년에 들지 않았음은 더욱 분명하다. 평균수명과 사회활동연령도 갈수록 훨씬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어렴풋하게나마 데드라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1차적인 퇴직을 한 뒤나, 평균수명이 개인에 대한 보장성은 없는 탓에 주위의 친구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세상을 뜨면서 생긴 현상인 것 같다. 내 시야에 데드라인이 잡히고 있음을 확인하는 때는 가령, 과거 수십년간 차마 버리지 못한 서가의 책들을 보면서 “어서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 때, 오래된 옷가지 따위를 과감히 한 보따리씩 싸서 버릴 수 있게 된 때 등이다.
책이나 옷가지가 짐이라기보다는 집착이 짐이었던 것이다. 데드라인이 눈에 들어오면 집착은 버리게 된다. 기자들이 매일처럼 치르는 데드라인 투쟁이 그렇다. 수많은 양의 정보를 취재해놓고 어느것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해 기사작성에 어려움을 겪다가도 데드라인 앞에 서면 필수적인 주요내용만 남겨놓고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지면이나 방송시간이 모자란다면 그나마 필요한 정보조차 버려야만 한다.
데드라인이 시야에 들어오고, 집착과 같은 짐 또는 짐과 같은 집착도 하나씩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좀더 자유로워진 듯하다. 하지만 아직 버리고 갈 것만 남은 건 아니다. 절반의 귀향, 황혼이 지기까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천천히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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