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호 칼럼] 뭉크의 절규와 생존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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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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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1863년에 태어나 30살이 되던 해에 '절규'라는 그림을 그린다. 고교시절 미술교과서에 실린 그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가 30년의 세월을 격하여 최근 명화집에서 그 설명을 읽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요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림 속에서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주인공이 공포에 머리를 감싸고 있고 주변의 하늘은 핏빛 모습으로 오로라처럼 날리고 있다. 우아하고 환상적인 여신의 머릿결이 아니라 정신나간 여자가 산발한 듯 아무렇게나 날리고 있고 강물인지 바닷물인지 검푸른 물결은 구름과 맞닿아 기괴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이런 그림이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약 1억2000만 달러(당시 원화로 약 1258억원)에 팔렸다. 예술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그림으로 인정하는 것 같아 보인다.
뭉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노르웨이에서 의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뭉크는 5세에 어머니를 잃고 10세에는 동생도 잃는다. 본인은 천식과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가 우울증이 심해져 공황장애까지 앓게 된다. 육체적 고통과 상실로 인해 우울증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해 그린 그림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다시 한번 더 바라보게 되고, 또 들여다보면 내 마음 깊은 곳의 심연을 흔들고 내 아픔을 어루만지는 느낌을 준다. ‘나만 느끼는 불안감이 아니었구나’, ‘이 사람도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구나’라는 위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1893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1980년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했던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의 포스터로 다시 한번 대중에게 다가온다.
현대인은 말은 안 하지만 불안과 공포라는 정서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이 있다. 그렇게 되면 휴대폰 비용은 어떻게 낼까? 친구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할까? 아니 친구들이 만나는 줄까? 하는 불안이 옆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단행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면서 공포로 바뀐다. 정규직으로 대기업에 취직은 되었지만 40대에 우수수 명퇴당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이제 전세 얻고 갓난아이 하나 낳은 가장으로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입시전형이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데 좋은 대학 가고 직장 잡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얼마를 물려줘야 할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불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지금 회사는 안정단계로 들어가고 있는데 구매계약이 취소되지나 않을까? 세무조사가 또 나오는 것은 아닌가? 노조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잘돼도 안돼도 대체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다.
과거의 인류는 죽음이 두려웠고 공포스러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윤회의 사상이고 사후세계였다. 유교를 믿고 제사를 지낸 우리 선조들은 죽음 이후에도 조상들이 귀신이 되어 후손을 보살핀다는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존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명문대학을 나와서도 40대면 잘릴지 모르는 월급쟁이 신세가 될까봐 두렵고, 대학 가기도 어렵지만 나와봤자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 세상이 무섭다. 과거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도 이제는 급격히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존경심과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현관문만 나서면 하이에나떼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세상이 내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없고 정서적으로 나약하여 나만 느끼는 일일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뭉크의 그림이 현대 인류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화의 포스터로도 부활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정치권이 바꿔야 한다고 외치기만 하면 될까? 우리 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얘기해 왔다. 가진 자들이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며 연말연시에 한번씩 펜으로 입으로 질타를 한다. 그러다 때 되면 연탄을 나르는 사진부터 김장을 담그는 장면 등등 일련의 이벤트들이 시리즈처럼 등장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으로 변할 수 있을까?
이제는 그런 감성적인 접근들이 아니라 실체를 변화시켜야 할 때다. 부양할 사람이 없으니 애를 낳아야 한다고 온 나라에 광고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것이 행복이고 누구에게나 자아실현을 위한 충분한 배려와 지원이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본다.
정치권이 문제라고 절규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먹물 묻은 지성인과 사회의 혜택을 음으로 양으로 입은 사람들, 종교계의 지도자들을 아우른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다 같이 나서서 우리의 발전과 행복을 가로막는 제도와 관행을 고쳐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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