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협치에 대한 짝사랑, 그리고 거버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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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0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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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재호]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여당이 이낙연 국무총리 인준투표안을 강행 처리한 날이었다. 그는 “인사청문회의 도덕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나쁜 선례를 남겼다”면서 “문재인 정부의 독선과 독주, 협치(協治)의 실종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흘 전 대통령이 “협치를 하자”며 제안했던 ‘여·야·정 상설 국정협의체 구성’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협치란 게 고작 이런 거냐고 그는 되묻고 있었다.
여당 책임이 크다. 지키지도 못할 5대 인사원칙이란 걸 내놓고 이번만 봐달라는 식이었으니 모양이 우스웠다. 애초 의욕이 앞서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곧바로 사과라도 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걸 청와대와 여당의 ‘위선적 협치’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바른 인식은 아니다. 정 대표가 실종됐다고 비난한 ‘협치’는 원래 없었다. 협치는 그런 게 아니다. 한국당은 여전히 보수의 적통을 자임하는 제1야당이다. 협치를 제대로 알아야 할 이유다.
협치는 행정학 또는 정치학적 용어인 거버넌스(governance)를 번역한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다. 서구에선 1980년대부터, 한국에선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일단의 행정학자들이 ‘거버넌스의 이해’라는 입문서를 펴낸 게 2002년이다. 처음엔 그냥 거버넌스라고 썼다. 사회과학적 용어들이 늘 그렇듯이 알 듯 말 듯해서 더 주목을 받았다. 논문 제목엔 거버넌스라는 말이 들어가야 그럴듯해 보였다.
거버넌스는 ‘통치’로 번역되는 거번먼트(government)와 대비된다. 거번먼트는 전통적인 정부 주도(지배) 하의 사회적 문제의 해결방식을 말한다. 반면 거버넌스는 정부와 시장, 시민사회 간에 참여와 협조를 통한 해결방식을 지칭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권력의 원천이 다원화되고, 시장과 시민사회가 급성장하면서 어떤 정책도 정부의 힘만으로는 펼 수 없게 됐다. 이처럼 달라진 현실이 거번먼트 대신 거버넌스라는 새로운 방식(현상 또는 문화)을 낳은 것이다.
거버넌스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분야가 복지다. 복지정책을 제대로 펴려면 정부-시장-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정부 예산만으로 복지 수요를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기업으로부터 기부금도 받아야 하고, 시민사회단체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걸 고려해서, 바꿔 말하면 유기적으로 연결(네트워크)해서 복지문제를 푸는 것, 이게 곧 복지 거버넌스다. 논문으로 쓴다면, 제목은 ‘한국적 복지 거버넌스의 방향’ 쯤이 될 것이다.
거버넌스가 언제부터 ‘협치’로 사용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거버넌스를 ‘함께 다스림’으로 풀어쓴 학자들도 있었는데, 이게 협치로 바뀐 듯하다. 혼란은 ‘협치’가 정치권으로 넘어오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이 협치를 여야 간 협조, 상생의 뜻으로 쓰면서 원래의 거버넌스와는 전혀 다른 말이 돼버린 것이다. 정치인 입장에선 ‘협조’라는 말은 어쩐지 작아(비굴해) 보이고, ‘연정(聯政)'이란 말은 너무 크고 무거웠던 참에 ‘협치’라고 하니, 쓰기에 편했을 것이다.
협치는 상대를 회유, 공격하기에도 좋았다. 여당은 협치를 내세워 야당의 저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야당은 협치를 내세워 여당을 압박할 수 있었다. 갑자기 협치는 여야 모두에게 최고의 덕목이 됐다. 기이한 일이다. 거버넌스가 ‘협치’로 번역된 것도 그렇지만, 설령 적절한 번역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함께 다스림(협치)'을 할 마음도 없고, 준비도 안 됐는데 여야가 경쟁하듯 협치를 외친다. 당혹스럽다.
진정으로 협치(함께 다스림)가 이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가진 자가 먼저 양보하면 된다. 필요하다면 사안별 연정(소연정)이라도 제의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의 국정 과제들을 보면, 야당 측의 단순한 협조보다 연정 수준의 제휴가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 많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과연 그럴 의사가 있을까. 글쎄다. 협치(연정)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승자독식의 대통령제를 한껏 즐기면서 입으로만 협치를 되뇐다는 지적도 있다. 인사청문회 협조 정도를 협치로 보는 게 여당이 생각하는 협치라면 그런 협소한 협치관(觀)에 뭘 기대할까.
이러니까 ‘협치 프레임’, ‘협치의 덫’ 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당은 그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없는 협치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야당 본연의 책무에 충실하면서 거버넌스로 돌아가야 한다. 시장과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통한 ‘개혁보수 거버넌스’의 구축에 힘을 쏟으라는 얘기다. 거버넌스에 관한 한 보수는 진보에 한참 뒤져 있다. 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추구한 거버넌스-이걸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가 고작 전경련을 동원한 관제데모였다.
한국당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대상은 협치가 아니다. 거버넌스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2014년 선거에서 내건 구호가 ‘Less government, More governance’였다. 가히 타산지석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동신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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