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 칼럼] 지금, 민심을 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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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0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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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칼럼
 

[사진=김형민]


장장 10년의 트로이 전쟁 끝에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또 10년을 바다에서 떠돌아야 했던 오디세우스. 그가 겪은 수많은 시련 중 필자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세이렌 섬을 지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이다.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노래에 저항하다 점차 미쳐가는 오디세우스의 표정을 너무나 리얼하게 인상적으로 그린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이란 그림 덕분이다. 왜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는 밀랍으로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은 몸을 뱃기둥에 묶게 한 채 그냥 귀를 열어놓고 세이렌의 목소리를 굳이 들으려 했을까?
독자들께 전하는 오늘의 제 이야기는 ‘경청’에 대해서다.

수년 전까지 거의 8년 동안 한 공중파 방송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한 필자로서는 이 ‘경청’의 중요성에 대해 할 말이 참 많다. 잘하는 토론의 시작에는 반드시 ‘경청’의 수고로움이 있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이다. 상대 토론자의 주장을 잘 듣기만 해도 자연히 적시에 내 할 말이 생기고 그 말에 생기와 지혜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청’을 생략한 채 내 할 말만 생각하는 토론자는 십중팔구 비참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토론장을 떠나게 된다. ‘경청’이 중요한 때다. 위기의 국가, 곤경에 처한 국민들 그리고 새로 출범한 새 정부를 위해서 그렇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문재인 정부는 파격을 담은 대통령의 겸손한 행보로, 탕평과 능력위주의 인사로, 고달픈 민생에 희망을 주는 정책발표로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꽤 성공한 듯하다. 간혹 노출되는 성급한 결정도, 아쉬운 인사검증도 뭔가 해보겠다는 열정과 진지한 마음의 부정적 소산으로 받아들여지는 듯도 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해내지 못한 임기 초반의 개혁이 가능한 것 아닌가 하는 국민적 기대도 높다. 그래서 더욱 더, 문재인 정부에게는 바로 지금이 국민의 진정한 소리를 경청해야 할 때다.

국민의 소리를 취합하고 판단하는 ‘민심독법’은 선거 전과 선거 후가 확연히 달라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키우는 관점에서 ‘경청’해야 바로 읽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한다. 선거를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해 남발하는 公約이 선거가 끝난 뒤 空約이 되곤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것이 대통령의 선거공약이라면 참 어렵다. 가능하면 지키려 한다. 대통령의 약속은 무겁게 지켜져야 하니까. 이런 경우에도 대통령과 핵심 정책결정자들이 해야 할 올바른 길은 역설적으로 公約을 空約으로 바꾸는 일이다. 선거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던져진 공약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지킬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할 ‘공약재검토위원회’ 혹은 조금 과격하게 이름 달자면 ‘공약백지화위원회’를 만들어서 이 일을 맡겨야 한다. 목소리 큰 이익단체, 유권자단체들을 위해 해야만 했던 헛된 약속들은 원점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다수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면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국민의 진정한 목소리를 겸허하게 듣고 당장의 반대에 부딪칠 게 분명해도 그 길이 궁극적으로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을 고양하는 방향이라면 그 길로 가야 한다.

대선 때 ‘탈원전’공약을 내 걸었던 문재인 정부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을 이행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다 한다. 출범 한 달도 안돼 핵심 공약을 철회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엄청난 경제적 손실에 직면한 울산 울주군 주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선거 전 철저한 이행을 약속한 핵심공약들일지라도 각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해 다시 평가해 봐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누구나 지적하듯,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전 대통령 박근혜의 ‘혼밥’ 습관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권력자 주변에 병풍처럼 펼쳐지는 사람장벽을 뚫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안했다는 뜻이니 그 부족한 헤아림이 안타깝기만 하다.그동안 관행적으로 써 오던 특수기밀비 지출을 대폭 줄이겠다면서 밥값 등 사생활비용은 대통령 개인 부담할 것이라는 새정부 청와대측 발표는 그 아름다운 뜻은 차치하고 그래서 좀 아쉽다. ‘삼시세끼’를 모두 사람 만나 얘기 듣는 자리로 활용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가 범상치 않게 들리는 소이연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는 밥값은 국민세금이어야 한다. 민의를 듣는 밥값이라면 어느 누가 대통령의 ‘삼시세끼’ 밥값에 인색하랴. 그렇게 수없이 자리를 만들어 수없이 다양하고 많은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신성한 의무이며 엄중한 숙명이다.

소수여당의 앞길에는 수많은 험난함이 예고되어 있다. 여당이 원하는 협치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참으로 껄끄럽게 들릴 야당의 목소리 한 마디 한마디에도 귀기울여야한다. 우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지혜를 열어야 야당과의 협치도 얻고 국민의 믿음도 얻을 것이다. 치명적인 유혹이 담긴 세이렌의 노래에도, 반대만 일삼는 듯 여겨질 거친 야당의 목소리에도 극한의 인내심을 지키며 귀 닫지 말아야 모험의 대장정을 아름답게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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