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①] ‘서양 그림자극’, 상하이에 상륙하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김봉철 기자
입력 2017-05-25 11:1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중국 그림자극의 모습. [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상하이(上海). 바다로 나가는 도시. 그러나 도시는 이름과 달리 바다를 통해 들어온 서양인을 맞이하면서 변모했다. 청나라 말까지 갈대가 우거졌던 어촌은 영국의 ‘침략’을 통해 거듭났다. 중국 최초로 서구 열강과 맞붙었던 아편전쟁(1840~1842)의 결과였다. 밀려드는 영국 군함에 속수무책이었던 중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누군가는 “근대 최초의 더러운 전쟁”이라고 말했다지만, 힘의 논리는 거대한 중국을 굴복시키고 말았다.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청나라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신 기영(耆英)과 이리포(伊裏布), 영국의 헨리 포틴저는 1842년 8월 장강까지 쳐들어온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문서인 난징조약에 서명했다.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보상금 21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등 네 항구와 더불어 상하이도 개항했다. 함께 문호를 연 다섯 도시 중 상하이의 발전 속도가 가장 빨랐다. 영국(1843), 미국(1848), 프랑스(1849)가 잇달아 땅을 빌려 조계를 세웠다. 조계지는 제국 열강의 진출로 인해 타국에 임대해준 지역을 말한다.

그 결과, 상하이 남북을 가로지르는 황푸강(黃浦江) 서쪽 연안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와이탄(外灘)이라고 불리는, 은행 건물 즐비한 지역이 바로 옛 조계다. 그 뒤쪽 인민공원과 난징루(南京路) 역시 상하이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화려해졌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가깝게는 장쑤 지역부터 멀게는 동북과 서북, 서남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852년 54만명 남짓한 인구가 1910년 129만명으로 껑충 뛰었다. 1937년에는 380만명의 대도시가 됐다. 중국 다른 도시들과 달리, 상하이에는 이렇다 할 전통이란 게 없었다. 신흥도시이자 이민자의 도시로서 그야말로 이질적인 문화가 융합하고 있었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과감했다. 파리에서 유행하던 모피 코트는 상선을 타고 두어 달 뒤면 상하이에 입항했다. 조계에 새로 들어선 건물들은 저마다 스타일을 뽐냈다. 건축 박람회가 열렸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1896년 중추절, 상하이에는 또 하나의 신기한 서양 물건이 들어왔다. 일부 기록은 8월 11일이라고 날짜를 못 박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이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 날짜임에 틀림없다. 양력으로 셈하면 9월 중순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저장성 하이닝(海寧)시 출신 거부였던 쉬(徐)씨의 개인 정원이던 서원(西園)의 자솨오락장(雜耍遊樂場)이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순간이다.

제7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영화는 다른 예술과 달리 자신의 생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1895년 12월 28일. 여러 사람들의 지난한 노력 끝에 필름과 카메라가 발명되고 움직이는 영상을 촬영할 수 있게 됐다. 영화 발명의 주인공은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였다. 형제는 파리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찍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퇴근 모습, 정원에 물 뿌리는 사람, 시오타 역에 들어오는 열차의 모습 등, 세계 최초의 영화는 1분 안팎의 ‘기록’이었다. 파리의 한 살롱에서 상영된 ‘영화’를 본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마치 기차가 튀어나와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도 했다. 이 ‘물건’이 돈 좀 되겠구나하고 생각한 형제는 이듬해부터 세계를 돌며 선전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인도 뭄바이를 거쳐 상하이로 들어왔다. 뤼미에르 상영단의 아시아 ‘순회상영’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중국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영화를 받아들인 나라가 됐다. 일본과 당시 조선보다 1년 더 빨랐다. 오늘날 중국과 인도의 영화 생산량이 할리우드에 뒤이어 세계 2~3위를 다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물건’을 두고 ‘서양 그림자극’(西洋影戱)이라고 불렀다.

그림자극은 중국 전통 공연의 일종이다. 동남아 지역에도 꽤 많은 그림자극이 내려오고 있다. 어디서 먼저 시작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예부터 중국인이 그림자극을 즐겼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림자극은 스크린 비슷한 넓은 장막을 내걸고 그 뒤에서 그림자 인형을 조작하면서 대사도 하고 노래도 하는 연극이다. 관객은 장막 앞에 비치는 그림자의 움직임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영화를 처음 본 중국인들은 그림자극을 떠올렸다. 신기했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장막 뒤에 인형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림자극이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었다. 다만 멀리 바다 건너 왔으니 ‘서양 그림자극’이라고 불렀다. 영화를 두고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인 중국인의 발상은 훗날까지 중국영화의 중요한 특성을 결정하는 어떤 기원 같은 선택이 됐다. 중국인은 서양의 신기한 물건을 발 빠르게 ‘자기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상하이는 그렇게 중국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한 도시가 됐다.

◆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및 중국어통번역학과 교수·대만연구센터장·홍보실장,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 중국영화포럼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한국외대에서 중국영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영화를 중심으로 아시아 대중문화의 초국적 유통과 소비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최근 펴낸 책으로 ‘수신기: 신화란 무엇인가’(공역)가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