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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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5-1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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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태극무공훈장을 받지 못한 유일한 전쟁영웅이자 호국인물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전쟁영웅이다. 그에 따른 역사적 위상도 대단하다. 차일혁이 국가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6·25전쟁 중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뛰어난 전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차일혁은 ‘6·25전쟁영웅’, ‘호국의 인물’,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에 선정되어 국민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차일혁은 그의 뛰어난 전공으로 볼 때 당연히 받아야 될 대한민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太極武功勳章)을 받지 못했다.

 6·25전쟁 때 이승만 정부에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명부(名簿)인〈태극무공훈장부〉에 의하면 태극무공훈장은 모두 191개를 수여했다. 그 중 국군이 73개, 경찰관이 1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117개이다. 국군이 받은 73개 태극무공훈장 중에서 2개씩 받은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된다. 전쟁 중 육군총장을 지낸 백선엽(白善燁, 합참의장 역임)과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역임) 장군, 해군총장을 지낸 손원일(孫元一, 국방부장관 역임) 제독, 공군총장을 지낸 김정렬(金貞烈, 국방부장관·국무총리 역임) 장군,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申鉉俊, 초대 바티칸대사 역임) 장군, 군단장을 지낸 유재흥(劉載興,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 그리고 사단장을 지낸 강문봉(姜文奉, 2군사령관 역임)·장도영(張都暎, 육군총장 역임)·송요찬(宋堯贊, 육군총장 역임) 장군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게 되면 국군 장병 중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64명밖에 안 된다. 경찰관 중 유일하게 받은 사람은 6·25전쟁 때 치안국 작전참모를 맡아 치안국장 대리로 군과 경찰의 원활한 작전을 위해 연락을 담당했던 치안국 경무과장 최치환(崔致煥) 경무관이다. 일선 전투지휘관이 아닌 참모가 받았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이들 외에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전쟁영웅은 많다. 춘천전투에서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하여 ‘자주포 킬러’로 알려진 심일(沈鎰) 소령, 의정부 전선에서 연대장으로는 최초로 전사한 함준호(咸俊鎬) 장군, 서울 함락직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한강방어선을 꿋꿋이 지켜 낸 김홍일(金弘壹, 군단장 역임) 장군, 낙동강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38선을 최초로 돌파한 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전사) 장군, 백마고지전투의 영웅 김종오(金鍾五, 합참의장 역임) 장군, 8사단장으로 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가(李成佳, 군단장 역임) 장군, 백두산호 함장으로 대한해협 전투에서 적 게릴라 수송선을 격파한 최용남(崔龍男, 소장 전역) 해군 중령, 전투기를 몰고 적 전차로 돌진하여 산화한 공군의 이근석(李根晳) 장군, 통영에 침투한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해 국군 최초로 통영상륙작전을 전개하여 ‘귀신잡는 해병’ 신화를 낳은 해병대의 김성은(金聖恩, 국방부장관 역임) 중령, 치열한 전투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던 이명수(李明守) 일등상사, 김옥상(金玉祥) 일등병, 홍재근(洪在根) 이등병 등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다. 이들 모두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을 만한 뚜렷한 공적을 분명 세웠다. 그래서 국가로부터 대한민국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분들은 국가로부터 거의 대부분 전쟁영웅 또는 호국의 인물, 그리고 그 중 극소수 인물이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人)’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빠진 사람이 바로 차일혁 경무관이다. 그렇다면 차일혁의 전공(戰功)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딱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차일혁의 공적은 “차고 넘친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태극무공훈장을 2개 이상 받을만한 충분한 전공을 세웠다고 여겨진다. 1950년 12월 중순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창설된 제18전투경찰대대와 이후 연대급 규모의 경찰토벌부대인 철주부대장, 무주경찰서장과 임실경찰서장, 그리고 지리산 평화와 후방지역 안정을 위해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제2연대장으로서 활약한 차일혁의 전공은 당시 언로보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상세히 알려졌다.

 아마도 차일혁의 부대와 지휘관이었던 차일혁의 활약상이 언론에 그렇게 각광을 받은 예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언론에 보도됐던 차일혁 부대의 활약상을 살펴봤더니, 차일혁 부대의 언론 보도기사는 총 118회에 달했다. 그 중 순수한 토벌작전 관련 기사만 110회에 달했다. 이는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더구나 국군 전투부대도 아닌 경찰부대가 그런 평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쇼킹(shocking)할 일이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언론에 보도됐던 차일혁 부대의 활약상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칠보작전에 대해서는 “필살(必殺)의 돌격에 적 패주”, “발전소 확보는 군경의 승리에 빛나는 선물이다”, “상금은 이재민에”, “치안에 공훈(功勳) 찬란”이라는 제하(題下)의 기사가 실려 있다. 고창작전에 대해서는 “차일혁 대대에 무공표창”과 “고창작전 잔비들 속속 투항”, “고창 선운산을 기습”을, 정읍작전에 대해서는 “결정적 섬멸전 전개”, “적은 순간에 혼비백산”, “견적필살(見敵必殺)의 18대(隊)”, “적의 본거지 격파”, “일발필중의 포착전”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명덕리전투에 대해서는 “적 본거지 무난히 격파”, “장하다 18전투대대”를, 가마골 작전에 대해서는 “경찰대합동작전 주효”, “철주부대 전과 혁혁(赫赫)”, “철주부대 수훈(殊勳)”을, 변산반도 작전에 대해서는 “고창방면 적을 완전 포위 소위 벼락병단 전멸”, “변산반도에 일격”, “계곡에서 포위섬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무주경찰서장 시절에는 “적에 미증유 치명상”, “적의 퇴로 완전차단”, “공비 격멸에 쇄신”, “무주서(茂朱署) 거듭 개가(凱歌)”를, 임실경찰서장 시절에는 “공비소탕에 협력을”, “잔여 공비 토벌에 전력을 경주할 터”, “소위 항미연대 맹타(猛打)”, “호남일대 암약하던 공비 수괴(首魁) 외팔이를 사살”, “적에 치명적 타격”, “잔비 토벌에 수훈”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서남전투경찰대사령부 제2연대장 시절에는 “공비 총두목 이현상 사살”, “이현상 사살한 유공자(有功者)에 대통령 수장(綬章)을 수여”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됐다. 차일혁의 활약은 어항속의 물고기처럼 투명하게 그때그때 언론에 보도됐다. 여기에는 거짓이 게재할 여지가 전혀 없다.

 차일혁은 언론에 보도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빨치산 토벌대장을 통해 경찰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 면에서 차일혁의 전공은 단연 ‘수훈(殊勳) 갑(甲)’이었다. 1950년 12월 중순부터 시작된 제18전투경찰 대대장 때는 구이작전,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화엄사 등 천년사찰 보호, 명덕리작전을 수행했고, 연대장급의 철주부대장 시절에는 가마골작전, 무주작전, 구천동의 삼공리전투를 치렀다, 무주경찰서장 재직시에는 백야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의 주도로 이뤄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고, 임실경찰서장 때에는 외팔이부대장 이상윤을 사살했다.

 1953년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시절에는 남한 내 빨치산총책인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함으로써 후방지역을 안정시키고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빨치산 사살 1,317명, 생포 375명, 박격포 등 무기류 369점 노획, 실탄 3,249발 노획, 쌀 1,071가마 회수, 농우(農牛)·양·말 46마리 회수, 경찰관 및 가족 53명 구출, 양민 708명 구출, 빨치산 아지트 1,973개를 파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차일혁의 이런 전공기록은 국방부, 내무부 및 치안국, 전북일보, 월간조선사,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대한민국참전경찰유공자회 등 국가 및 언론자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어찌된 일인지, 차일혁이 정부로 받은 무공훈장은 초라하기만 하다. 비록 차일혁이 경찰관 중에는 가장 많은 6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고는 하나, 3등급인 충무무공훈장이 차일혁이 받은 최고 등급의 훈장이다. 2등급인 을지무공훈장도 받지 못했다. 분명 무공훈장이 계급이나 신분에 차별을 두고 주지는 않았을 터인데도 그렇게 됐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다소 생뚱맞게 나왔다. 차일혁은 대한민국 전쟁영웅이자 호국의 인물이며 대한민국을 수호한 18인에 선정됐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분들이다.

 그렇다면 차일혁도 분명히 태극무공훈장을 받을 만한 전공을 세웠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차일혁은 드높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지 못했다. 차일혁만 유일하게 태극무공훈장을 받지 못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여 전시에는 국가가 혼란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빠트릴 수도 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특수한 상황으로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을만한 공적이 있는 데도 누락된 사람을 위해 참전 국군과 유엔군을 대상으로 심사를 하여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2010년을 전후해서 정부에서는 공적이 뚜렷한 국내외 참전인사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렇게 해서 홍천 말고개에서 북한군 자주포를 육탄공격으로 파괴한 조달진 일병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했던 미국의 로우니(Edward L. Rowny) 장군도 뒤늦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최근에는 1949년 8월, 북한지역으로 해상 침투하여 몽금포에 정박해 있던 북한경비정을 파괴하고 1척을 납치해 온 일명 ‘몽금포작전’을 수행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한 공정식(孔正植) 장군도 아주 뒤늦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선양할 뿐만 아니라 국가 위기시 특히 전란(戰亂)시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에게 대한 국가가 해야 될 진정한 포상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곧 국가가 해야 될 명백한 도리이자 반드시 해야 될 책무라 여겨진다. 그래서 국가도 뒤늦게나마 태극무공훈장을 받을만한 분들을 선정하여 본인 또는 유족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국가가 해야 될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이런 점에서 요지부동(搖之不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찰은 6·25전쟁시 6만 명이 넘는 참전자와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통해 후방지역을 안정시킨 공로가 뚜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극무공훈장은 단 1개뿐이었다. 그것도 일선 전투지휘관이 아닌 참모출신이 받았다는 것도 다소 명분이 떨어진다.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후방과 전선이 따로 없다. 후방의 안정이 있어야 전선도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은 전쟁원칙에서의 자명한 진리다. 경찰에서는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하고 이에 대한 합당한 처리를 해야 될 것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아쉬움이 다소 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경찰청과 국가는 6·25전쟁시 경찰에 대한 공적을 정확히 심의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받을만한 분들이 누락되지 않도록 수여해야 될 것이다. 경찰 중에는 차일혁 경무관을 비롯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받을 만한 분들이 여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떤 논리에서인지 경찰관은 전후(戰後) 추가로 단 한명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지 못했다. 경찰이 이 일에 분연히 나설 때이다. 이는 경찰의 위상뿐만 아니라 경찰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빛나는 전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랑스런 호국경찰관들의 위업을 기리고 계승했을 때 경찰의 전통도 확립될 수 있다. 전통은 남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대한민국 경찰도 치안경찰, 민생경찰, 나아가 전시 호국경찰로서의 그 역할과 본분을 충분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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