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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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3-1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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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부하의 잘못까지도 책임질 줄 아는 전투경찰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타인의 과오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도 자신의 조그마한 실수나 부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리 소사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무릇 범인(凡人)이라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마냥 너그러우면서, 남의 실수에 대해서는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며 목소리를 높여 힐난하는 것이 인정상정(人之常情)일진데, 차일혁은 그러하지를 못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보호 본능이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자동차사고가 날 때 운전자는 대부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다고 한다. 무의식중에 행하는 자기보호 본능이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에 대해서는 되도록 덮으려하거나 축소하려고 한다. 자기의 직책이나 명예에 치명적인 누가 될 경우 더욱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아름다음과 추함이 여기에 달려 있다. 의인(義人)과 군자(君子)들이 자기성찰을 통해 이를 지켜낸 대인(大人)들이라면, 그렇지 못한 자들은 소인배(小人輩)에 해당된다 하겠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은 어땠을까? 차일혁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갔다. 그것도 말로서가 아니라 책임지는 행동을 했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사표를 제출했다. 부하가 전적으로 잘못했을 때도 그랬고, 작전에서 부하들의 희생이 컸을 때도 그랬고, 오해를 불러올 부하들의 축소 또는 잘못된 보고에도 차일혁은 자신이 책임졌다. 작전을 통해 얻은 공(功)은 부하들에게 돌리면서도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부하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했다.

 차일혁이 빨치산토벌대장을 맡은 이래 첫 시련은 고창군 심원면 토벌작전 때 찾아왔다. 때는 1951년 5월이었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대장에 임명된 지 5개월째였다. 고창에는 주변의 험한 산세 탓인지 빨치산들이 유난히 준동하고 있었다. 한 달 전에도 토벌했는데 또 다시 빨치산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차일혁은 곧 있게 될 대대적인 군경합동작전에 대비하여 부대대장 이병선 경감과 3중대장 김용운 경위를 출동시켰다. 원래는 1중대장 우희갑 경위가 출동할 차례였는데, 3중대장 김용운 경위가 작전지역이 자신의 고향과 가깝다면서 자청하는 바람에 이병선 경감과 함께 출동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차일혁은 3중대 대신 토벌경험이 많은 1중대를 딸려 보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출동한 지 몇 시간 후 부대대장 이병선 경감이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차일혁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느꼈다. “3중대장 김용운 경위가 심원면에 들어가 빨치산 가족들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사건은 이랬다. 김 경위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는 지주와 소작농이 7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른바 지주인 김씨들이 사는 용정마을과 소작농인 천씨들이 사는 죽림마을이었다. 그러다 보니 두 마을 주민들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무장면이 북한군 점령하에 들어가자 소작농들 중 좌익에 속한 자들이 김 경위 가족들을 ‘악질 지주와 우익’이라 하여 즉석에서 ‘인민재판’을 열어 산 채로 생매장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김 경위 친척 20여명도 처참하게 학살했다. 그 당시 김 경위는 국군에 입대해 육군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급작스런 비보(悲報)에 접한 김 경위는 원한을 갚고자 전투경찰에 투신했다. 김 경위는 도경국장과 군 관계자의 추천으로 어렵지 않게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로 들어오게 됐다. 들어온 지 1개월 밖에 안 된 상황이라 차일혁도 김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할 때였다.

 1중대원들을 이끌고 죽림마을에 들어간 김 경위는 소작농들을 집결시켰다. 마을 청년들은 9·28 수복 이후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을에는 노인과 아녀자들뿐이었다. 김 경위는 인솔해 간 1중대원들에게 ‘빨갱이 가족들’이라며 즉결 처형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중대원들은 빨치산 가족이라 해도 조사를 해서 법에 따라 처리해야지 함부로 즉결 처분할 수 없다며 김 경위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1중대원들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대대장께 보고하겠다고 하자, 김 경위는 집결시킨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올라갔다.

 두려움에 질린 채 주민들은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김 경위는 주민들을 산중턱의 대밭에 몰아놓고, 아래로 내려와 부대대장에게 무전기로 보고했다. 마을에 있던 공비들이 산으로 도주하고 있으니 즉시 중화기로 공비들의 도주를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화기 부대는 김 경위의 지원 요청에 대한 내막도 모른 채 산중턱을 향해 집중 포격했다. 부대대장이 김 경위에게 속았음을 안 것은 이미 포탄을 퍼붓고 난 다음이었다. 50여 명의 주민들이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해리면에 살던 주민 한 명이 아들의 약을 구하러 죽림마을의 친지 집에 머물다가 참변을 당했다. 소작농 중 아들이 현역 상사로 있는 한 가족만이 간신히 화를 면했다.

 부대대장은 김 경위를 포박해 대대본부로 데려왔다. 차일혁 앞에 끌려온 김 경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차일혁은 김 경위를 향해 일갈(一喝)했다. “네가 부모와 친척들을 죽인 공비들의 가족을 죽임으로써 네 자신의 원수를 갚았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경찰로서 민심을 수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을 희생시키는 우를 범했다. 작전명령을 어기고 주민들을 속여 산으로 피신케 한 다음 중화기 부대에 적이 나타났다고 보고해 주민들에게 포화를 퍼부은 것은 이중 삼중의 죄를 지은 것이 아니냐? 마땅히 법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차일혁은 차근차근 일을 하나씩 수습해 나갔다. 먼저 김 경위를 군법회의에 넘긴 다음, 자신은 전주로 가서 도경국장에게 사건경위를 소상히 보고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차일혁은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에게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김용운 경위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 상관인 제가 책임을 지고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도경국장과 도경 보안과장은 놀라며 사표를 만류했다. “무슨 소리요? 이 비상시에. 차 대장이 경찰에 들어와 성공적으로 전북의 치안을 확보해 놓았는데 무슨 사표란 말이오? 이 문제는 상부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염려 말고 공비토벌에 힘쓰시오. 조금 있으면 8사단과 합동하여 본격적인 공비토벌이 있을 예정이니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작전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도경을 나오면서 차일혁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면서 부대로 돌아왔다. 차일혁의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차일혁에 대한 김 국장의 깊은 신뢰감의 표시였다.

 차일혁은 무주 구천동에서 심곡리 주민들의 거짓 정보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도 작전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1951년 10월경이었다. 이 전투는 차일혁의 빨치산 토벌대장을 맡은 이래 첫 패배이자 가장 많은 희생을 낳게 했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전투를 통해 작전지역을 완전히 회복시키고,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도 모두 회수해 왔다. 뿐만 아니라 거짓정보를 흘려 많은 대원들을 희생케 했던 마을 주민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보복도 하지 않았다. 전우들의 시신을 보고 흥분한 대원들은 빨치산들과 내통한 ‘통비(通匪) 분자들을 처단하고, 마을도 불태워야 한다고 날뛰었지만 차일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빨치산과 토벌 군경들의 틈새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처단하기에는 그들의 처지가 오히려 불쌍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애로 깃든 차일혁의 따뜻한 마음이 비인도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부하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합동장례식을 치러주고, 장작불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부하들의 영혼을 위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염주를 돌리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그런 뒤 무주에서의 작전을 마무리 짓고, 전주로 돌아와 구천동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윤명운(尹明運) 도경국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윤 국장은 “무슨 소리요? 물론 구천동 작전에서 차 대장이 처음으로 패배했지만, 그래도 빨치산 6지대를 섬멸하는 성과도 있지 않소? 차 대장답지 않게 무슨 그런 약한 소리요?”하며 차일혁의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일혁의 전투지휘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윤 국장이 사표를 받아 드릴리가 만무했다.

 차일혁은 1952년 10월 무주경찰서장 시절에도 사표를 제출했다. 관할지역인 구천동 계곡에서 산화한 부하들을 위해 진혼제(鎭魂祭)를 올렸다. 마침 무주를 방문한 ‘햇님달님 여성국악단’과의 도움을 받아 진혼제를 올렸다. 굿이 끝난 뒤 차일혁은 자신도 모르게 계곡 물속에 뛰노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수류탄을 던지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차일혁은 원래 전투 중에도 산 짐승을 잡지 않았는데, 왠지 그 날은 자신의 불문율을 깨고 부하들이 많이 희생된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다 크게 다쳤다. 이를 지켜봤던 무주경찰서 보안계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일혁 서장이 훈련 중 수류탄을 잘못 다뤄 부상을 입었다고 도경에 허위보고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된 도경국장은 허위보고를 한 보안계장을 면직처분했다. 차일혁은 그걸 보고 가만있지 않았다. “허위보고는 자신이 시켜서 한 일이니 보안계장을 선처해 달라”고 말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런데 도경국장의 반응이 의외였다. “차 서장은 24시간 내로 임실서장으로 부임하시오. 사표는 공비토벌이 끝난 후 내무부장관에게 내시오. 차 서장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번만은 눈감아 주겠소”라며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일혁은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하들의 잘못까지도 책임지려고 했다. 빨치산 토벌작전을 할 때마다 차일혁은 전과도 중요시했지만, 더욱 중요시한 것은 부하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빨치산을 신속히 토벌하는 것이었다. 토벌 후에는 빨치산들의 시체를 매장해주고 포로들을 같은 동포로서 인간답게 대우했다. 그에게 포로학대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불필요한 살생이나 인간학대는 유난히 정(情)이 많은 차일혁의 생리(生理)에 애초부터 맞질 않았다. 토벌작전을 통해 진급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욕망’따위는 애초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명리(名利)는 필요치 않았다. 있다면 부하사랑과 빨치산토벌을 통한 후방지역의 안정뿐이었다. 겉으로는 맹호 같은 엄격한 지휘관이었지만 마음속에는 명리를 떠난 ‘부처님 같은 평정심’이 늘 흐르고 있었다. 그런 차일혁에게 잘못을 돌리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탓’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다. 차일혁이 부하들의 잘못까지도 자신의 과오로 여기고 책임을 지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의 상관들이 신뢰하고 부하들이 존경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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